미얀마는 내 마음을 사로잡는 나라다. 그곳에 가면 알 수 없는 서정에 사로잡힌다. 미얀마인들의 삶의 진행형이 어떻든 그들에게서 깊은 감동을 받은 적이 있다. 그 한 번의 감동이 내게는 미얀마 전체로 다가온다.
3년 전 미얀마를 처음 찾아갔다. 그때 만원 버스에, 아니 그것도 모자라 버스 위에까지 앉아서 가는 사람들의 풍경을 목격했다. 그들은 이상하게도 하나같이 웃거나 행복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풍경을 보고 우리 일행 중 누군가가 물었다. 그러자 가이드가 이런 대답을 했다. “저들은 모두 성지순례를 위해 가는 중입니다. 이 나라 사람들은 돈을 모아서 성지순례하는 것을 생애 최고의 기쁨으로 알고 살아갑니다.” 똑같은 성지순례지만 미얀마 사람들과 우리는 달랐다. 우리는 큰 버스에서 편안하게 다니지만 그들은 꽉 찬 만원버스에서 흔들리고 부대끼며 가고 있었다. 가이드의 얘기를 들으며 조용히 자문해 봤다. 성지순례를 위해 차곡차곡 돈을 모으며 기다려온 사람들과 우리들 중 누가 더 진정한 순례자인가.
언젠가 중국 오대산에 가서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차를 타고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중대를 순례하기 위해 일행과 함께 가는 길이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차로 한참을 올라가다가 우연히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멀고도 먼 산길을 걸어서 올라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멍했다. 그들의 모습이 너무 거룩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를 천천히 몰면서 그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어머니도 아들도 말 없이 조용히 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내생을 향해 올리는 참회와 발원의 기도처럼 숭고하게 다가왔다.
순례를 할 때마다 나는 진정한 순례를 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깨닫고는 한다. 내생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현생의 이 삶이 온통 순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만원버스에서의 긴 시간의 노역과 겨울날 살을 에는 그 시림도 마다 않고 중대를 향해 오르는 티베트 모자의 모습에서 내생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현생의 삶의 의미를 다시금 만나게 된다.
어둠이 내리고 불 밝힌 셰다곤 파고다에 앉아 영원을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영원을 사는 사람들은 지금 현재의 모습을 과거의 총화라고 본다. 그래서 지금의 모습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들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몸과 마음과 입으로 업을 짓지 않고자 노력한다. 그러면 다음 생에는 더 좋은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음 생을 위한 시작이 금생이므로 이번 생은 다음 생을 위한 성지가 되는 셈이다.
우리도 조금이나마 이런 마음으로 살아보면 어떨까. 다음 생을 위해 금생을 순례하는 마음으로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화가 나면 자신의 지각이 부족한 것으로 돌리고, 손해를 보면 전생의 빚을 갚았다고 생각하고 산다면 그것은 너무 바보 같은 짓일까. 때로 이렇게 바보 같은 몸짓과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마음이 좀 편하지 않을까.
경허선사의 제자 혜월 스님이 양산 내원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스님은 어떤 사람의 꾐에 빠져 아주 헐값에 문전옥답을 팔아버렸다. 그리고 그 돈으로 몹쓸 땅을 사서 개간했다. 일꾼들은 일을 하지 않고 날마다 스님에게 법문을 해달라며 날을 보냈다. 보다 못한 제자가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혜월 스님이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시게. 우리 문전옥답은 있던 자리에 그냥 있지. 또 그 돈은 이렇게 품삯을 주고 있지. 없던 천수답 세 마지기도 생겼으니 무엇이 없어졌다는 건가.” 웃는 혜월과 분을 못 삭이는 제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다. 어쩌면 우리는 분을 못 삭이는 제자이고, 미얀마와 티베트인 순례자는 웃는 혜월인지도 모른다.
미얀마의 셰다곤 파고다에서 내가 꿈꾼 것은 이 세상 사람이 모두 혜월과 같은 바보가 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너무 똑똑하다. 그래서 오늘도 각자의 셈법으로 피곤하다.
성전 남해 용문사 주지
연합뉴스
연합뉴스
언젠가 중국 오대산에 가서도 이런 광경을 본 적이 있었다. 차를 타고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중대를 순례하기 위해 일행과 함께 가는 길이었다. 얼마나 올라갔을까. 차로 한참을 올라가다가 우연히 어머니와 아들이 함께 멀고도 먼 산길을 걸어서 올라가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그 순간 나는 멍했다. 그들의 모습이 너무 거룩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나는 차를 천천히 몰면서 그들을 유심히 살펴봤다. 어머니도 아들도 말 없이 조용히 길을 오르고 있었다. 그 한 걸음 한 걸음이 마치 내생을 향해 올리는 참회와 발원의 기도처럼 숭고하게 다가왔다.
순례를 할 때마다 나는 진정한 순례를 하는 사람들을 만난 것이다. 그때마다 나는 깨닫고는 한다. 내생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는 현생의 이 삶이 온통 순례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만원버스에서의 긴 시간의 노역과 겨울날 살을 에는 그 시림도 마다 않고 중대를 향해 오르는 티베트 모자의 모습에서 내생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현생의 삶의 의미를 다시금 만나게 된다.
어둠이 내리고 불 밝힌 셰다곤 파고다에 앉아 영원을 산다는 것의 의미를 생각해 보았다. 영원을 사는 사람들은 지금 현재의 모습을 과거의 총화라고 본다. 그래서 지금의 모습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하지만 그들은 보다 나은 삶을 위해서 몸과 마음과 입으로 업을 짓지 않고자 노력한다. 그러면 다음 생에는 더 좋은 모습으로 태어날 수 있다고 믿는다. 다음 생을 위한 시작이 금생이므로 이번 생은 다음 생을 위한 성지가 되는 셈이다.
우리도 조금이나마 이런 마음으로 살아보면 어떨까. 다음 생을 위해 금생을 순례하는 마음으로 살아보는 것은 어떨까. 화가 나면 자신의 지각이 부족한 것으로 돌리고, 손해를 보면 전생의 빚을 갚았다고 생각하고 산다면 그것은 너무 바보 같은 짓일까. 때로 이렇게 바보 같은 몸짓과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우리 마음이 좀 편하지 않을까.
경허선사의 제자 혜월 스님이 양산 내원사에 계실 때의 일이다. 스님은 어떤 사람의 꾐에 빠져 아주 헐값에 문전옥답을 팔아버렸다. 그리고 그 돈으로 몹쓸 땅을 사서 개간했다. 일꾼들은 일을 하지 않고 날마다 스님에게 법문을 해달라며 날을 보냈다. 보다 못한 제자가 따지듯 물었다. 그러자 혜월 스님이 제자에게 말씀하셨다. “보시게. 우리 문전옥답은 있던 자리에 그냥 있지. 또 그 돈은 이렇게 품삯을 주고 있지. 없던 천수답 세 마지기도 생겼으니 무엇이 없어졌다는 건가.” 웃는 혜월과 분을 못 삭이는 제자의 모습이 보이는 것만 같다. 어쩌면 우리는 분을 못 삭이는 제자이고, 미얀마와 티베트인 순례자는 웃는 혜월인지도 모른다.
미얀마의 셰다곤 파고다에서 내가 꿈꾼 것은 이 세상 사람이 모두 혜월과 같은 바보가 되는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너무 똑똑하다. 그래서 오늘도 각자의 셈법으로 피곤하다.
2012-11-24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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