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동호 고려대 국문학과 교수·시인
오늘 한국 사회의 가장 큰 문제는 부의 양극화 현상이며 이를 완충시켜 줄 중산층의 몰락이다. 최근 한 통계에 따르면 중산층은 점점 몰락해 가고 있으며 자신의 다음 세대도 이를 극복할 가능성이 없다고 믿는 세대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고 한다. 이런 현상은 한국 사회의 디지털적인 발전 속도에 적응하지 못하는 계층이 느끼는 소외감을 말해 주는 것일 터다. 그로 인한 적대감이 사회 전체에 점증하고 있는데 이를 치유할 복지선진화 방법을 찾지 못하고 있다.
다음으로 생각나는 것은 자원 빈국인 스웨덴이 오늘과 같은 강국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보다 창의적인 인재 양성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최근 한국 학생들을 가르쳐 본 외국의 석학들이 이구동성으로 지적한 것은 한국 학생들은 수업 시간에 질문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학생들 자체가 잠재력이 없는 것이 아니다. 진도를 위해 질문하지 않는 것이 미덕이라 여기도록 했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 스웨덴의 교육은 기존의 지식을 전하는 데 집중하지 않는다. 새로운 지식을 창출하기 위한 질문을 통해 학생들의 지적 성장을 유도한다. 기존의 지식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식에 의문을 갖도록 하고 스스로 이를 해결해 나가는 것을 교육의 중심으로 삼는다는 것이다. 지식 중심 교육은 일시적으로 빠른 성과를 거둘 수 있을지 모르지만 인류문화 발전에 기여하는 창의적 발견이나 새로운 패러다임을 만들어 내는 데 동적인 힘을 발휘하기 어렵다는 사실은 명백하다.
마지막으로 말하고 싶은 것은 스웨덴인들의 정치적 싸움이다. 스웨덴 격언 중에 ‘잘난 척하지 말라’는 말이 있다고 한다. 그들도 누가 잘나가는 것을 참고 보지 못하는 질투심이 많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결과가 나오는 과정에서는 온갖 싸움을 다 걸지만 일단 결과가 나오면 이를 수용하고 협조한다는 것이다. 한국의 경우 정치적인 문제를 막론하고 온갖 문제에서 쉽게 합의하지 못한다. 또 일단 합의했다고 하더라도 자신과 의견이 다를 경우 이에 불복하고 끝까지 이의를 제기하는 경우가 빈발한다. 이는 기득권자들에 대한 소외 집단의 분노로 발전하기도 한다. 이런 분노가 유발하는 행동들은 정의감으로 나타나며, 그것이 때로는 한도를 넘어설 경우에도 너그럽게 통용된다. 어떤 주장이 사실이냐, 아니냐가 판단의 기준이 아니다. 그것이 어떻게 사람들의 주목을 끌고 기존 세력의 부당성을 강력하게 비판하고 호소하느냐가 중요성을 갖는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세 가지 요소는 서로 밀접한 상관성을 갖는다. 부의 양극화, 질문 없는 지식 교육, 절차적 과정의 정당성 결여 등은 모두 사회질서를 왜곡하고 양극단의 충돌을 심화시키는 요인들이다. 경제적 발전만이 모든 것은 아니다. 사회 발전에 따라 다양한 욕구가 분출하고 이를 충족시켜야 할 필요가 발생한다. 한국 사회가 한 단계 더 성숙하기 위해서는 현재의 속도주의가 아니라 균형감각을 회복하고 복지 선진화를 위한 속도조절이 요구된다. 정치적 이익만을 위해 복지주의 경쟁을 한다면 한국은 내적 갈등 요인의 심화로 불안정하고 위험한 성장의 엔진을 멈추고 말 것이다. 노벨상은 누가 받고 싶어 외친다고 주어지는 것 같지는 않다. 100년 이상 이 상을 주관하면서 세계적 권위를 지켜 온 그들의 신중하고 확고한 자세를 객관적으로 바라볼 필요를 느낀다.
2011-12-22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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