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파원 칼럼] 우리의 ‘레드 라인’은 무엇인가/김상연 워싱턴 특파원

[특파원 칼럼] 우리의 ‘레드 라인’은 무엇인가/김상연 워싱턴 특파원

입력 2013-08-31 00:00
수정 2013-08-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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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그만 다음 주제로 넘어가도 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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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상연 워싱턴 특파원
김상연 워싱턴 특파원
미국 국무부 언론 브리핑에서 자주 들리는 말이다. 한 이슈에 대해 어느 정도 문답이 진행됐을 즈음 대변인 또는 기자가 화제를 옮기자고 제안하는 것이다. 그만큼 브리핑에서 다뤄지는 이슈가 방대하다는 얘기다. 매일 1시간씩 진행되는 브리핑에서 나오는 질문은 중동에서부터 동아시아, 유럽, 중남미, 아프리카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구석구석을 망라한다. 그중에는 미국과 직접적 관련이 없는 질문도 많다. 그 문답의 홍수 속에 앉아 있노라면, ‘도대체 왜 미국 대변인은 저렇게 많은 나라의 현안에 대해 일일이 답변할 의무가 있을까’라는 의문이 들기까지 한다.

요즘 국무부 대변인은 시리아에서 화학무기로 갓난아기를 포함해 수많은 민간인이 숨진 사건에 대한 미국의 대응을 추궁하는 질문에 진땀을 흘린다. 미국사람들이 쓰는 영어 표현 그대로 대변인을 뜨거운 그릴 위에 올려놓고 달달 볶는 식이다.

한국 외교부 홈페이지를 들어가 봤다. 외교부 대변인이 정례 브리핑을 시작하면서 시리아 화학무기 사태를 우려하는 논평을 짧게 읽은 게 전부였다. 브리핑에서 시리아에 관한 문답은 전무했고, 대부분 ‘우리만의 문제’를 묻고 답하고 있었다.

물론 초강대국으로 시리아의 운명을 좌우할 힘을 갖고 있는 미국과 북한을 상대하기도 벅찬 한국을 단순 비교하는 것은 무리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정도의 무관심이 세계 10위권 경제규모에 국방력도 10위권 안쪽인 한국의 국력에 걸맞은 것은 아니다. 우리는 아직도 우리가 힘없고 가난했을 때의 사고에 갇혀 있는 것은 아닐까.

화학무기 사용은 이념과 국경을 떠나 분개해야 하는 반(反)인륜적 범죄다. 그런데도 한국은 몇 줄짜리 대변인 논평 정도로 반응하고 있다. 한국 외교부 장관이 존 케리 미 국무장관처럼 브리핑룸에 내려와 분노를 표시하면 주제넘는 행동일까. 탈북 어린이를 위해 단식 투쟁을 하는 국회의원이 시리아 어린이를 위해 단식하면 생뚱맞은 행동일까.

목소리를 키우면 국익에 손해가 될 수도 있다. 중동에서 장사하는 기업이 어려워질 수도 있고, 군사 행동에 동참을 요구받는 상황이 올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손해를 무릅쓰고 가치를 우선해야 하는 사안이 있다. 지금 미국 입장에서 시리아 공습은 득보다 실이 많다. 천문학적 재정적자로 새로운 전쟁을 시작할 여력이 없는 데다 국제테러단체와 연계된 시리아 반군보다는 아사드 정권이 존속하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과거 이라크 독재자 사담 후세인의 화학무기 사용을 눈감아줬던 미국이 이번엔 ‘금지선’(레드 라인)을 넘었다며 발끈하는 것은 아이들의 처참한 시신이 화면으로 만천하에 공개됐기 때문이다. 그걸 보고도 외면하는 것은 ‘미국은 세계를 구원할 의무가 있다’는 그들 특유의 선민의식적 가치관, 즉 ‘미국 예외주의’에 어긋나기에 위선적일지라도 시늉은 내는 것이다.

한국의 가치는 무엇인가. 스마트폰과 자동차를 많이 팔아 부자나라가 되는 게 가치가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역사상 한번도 남을 침략한 적이 없지만 반인륜 범죄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분노하는 나라’를 우리의 가치로 삼을 수는 없을까. 그것을 ‘한국 예외주의’라고 불러도 좋을 것이다.

carlos@seoul.co.kr

2013-08-31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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