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번 시내버스를 타고 창경궁을 스쳐 지나갈 때마다 나는 궁의 담 높이에 절망한다. 아름답고 단아한 그 담장의 디자인은 외국인 누구라도 붙잡고 마구 자랑하고 싶지만, 안보적 측면에서 그 담의 키는 나를 부끄럽게 한다.
어쩌자고 우리 선조들은 무인경비시스템도 없었던 시대에 왕궁의 담을 그토록 낮게 만들었을까. 무동 한번 서면 훌쩍 넘어갈 그 담의 높이는 문(文)의, 문에 의한, 문을 위한 나라 조선의 긴장도를 고스란히 반영한다. 조선의 백성들은 왕궁의 담을 감히 넘어올 만큼 성정이 사납지 않았을 테니 담장을 높게 쌓을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창경궁·덕수궁·경복궁의 담벼락에 익숙했기에 몇년 전 일본 교토(京都)에서 맞닥뜨린 어떤 궁의 담 높이는 내게 충격이었다. 궁을 두르고 있는 담의 키는 창경궁의 몇배나 됐고, 그것도 안심이 안 됐는지 담의 주위를 해자(垓子)가 휘감고 있었다. 담장이라기보다는 성벽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궁 안의 나무 복도를 걸을 때 삐걱삐걱 소리가 나기에 물어봤더니 잠잘 때 자객이 침입하는 것을 알아채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단다. 긴장 때문에 하루도 발 뻗고 잘 수 없었던 봉건국가가 일본이었다.
이 긴장도의 차이가 100여년 전 우리를 식민지로, 일본을 동아시아의 강자로 가른 근인(根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동양의 힘으로는 서양에 맞설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이 대낮처럼 훤히 드러났을 때 일본은 스스로를 개조할 힘이 있었다. 무(武)의 긴장 속에서 칼을 갖고 있었던 젊은 사무라이들은 ‘위로부터의 쿠데타’를 일으켜 일본을 신속하게 변신시켰다. 반면 칼을 천대했던 문약(文弱)한 조선은 이러저리 휘둘렸고, 아름다운 왕궁의 담장 안은 동물원으로 전락했다.
문(文)을 숭상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선조들의 DNA는 세월이 흐르고 국체(國體)가 바뀌고 강산이 몇번을 변해도 우리의 피 안에 면면히 흐르는가 보다. 나라를 지키는 군함이 적의 공격에 무참하게 두 동강 나 46명의 아들들이 불귀의 객이 된 이후 우리가 보여준 태도는 우리의 삼엄함이 창경궁의 담 높이에서 한 치도 자라지 않았음을 웅변한다.
무력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부를 것이란 이유로, 그리고 무력 이외의 방법이 더 효율적이라는 논리로 무력 응징을 제외한 응징들이 채택됐다. 그리고 사건 발생 6개월밖에 안 지난 지금 북한과 이제 그만 화해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어디선가 솔솔 들리기 시작한다. 가해자가 범행을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는데 피해자가 먼저 그만 털고 가자는 것은 어떤 나라, 어떤 국민들한테서도 찾아보기 힘든 우리만의 ‘이상한’ 정서다. 이런 특유의 정서에 대한 분석은 구구하지만, “잃는 게 두려워서”라는 게 가장 솔직한 이유인 것 같다. 휴전선이 시끄러워지면 주가가 떨어지고 아파트값이 떨어지고 군에 보낸 아들의 안위가 걱정되는 것이다.
미국 군함이 자기네 바다에서 멕시코 잠수정의 어뢰공격에 침몰했을 경우 미국이라면 우리처럼 했을까. 영국의 함정이 프랑스 어뢰에 격침됐을 경우 영국이라면 우리처럼 했을까.
정부는 여전히 북한의 천안함 사건 사과를 남북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고수하고 있지만 여론이 이른바 ‘출구전략’ 쪽으로 기운다면 선거로 뽑힌 정부는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평화’나 ‘화해’ 같은 말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나약함을 감추는 교언(巧言)으로 이용되면 그것처럼 추악한 단어도 없다. 이런 우리한테 정말 두려운 시나리오는 북한이 또 도발하는 것이다. 그때는 우리가 한번 더 참겠다고 할 명분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응전할 자신도 없을 텐데 어떻게 할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래도 이런 ‘굴신(屈身)의 처세’ 덕분에 약소한 우리 민족이 스러지지 않고 반만년 동안 생명을 부지해온 것이라고 누군가 강변한다면 할 말이 없다.
162번 버스는 오늘도 창경궁을 스치고, 창경궁 담벼락엔 가을빛이 완연하다.
carlos@seoul.co.kr
김상연 정치부 차장
창경궁·덕수궁·경복궁의 담벼락에 익숙했기에 몇년 전 일본 교토(京都)에서 맞닥뜨린 어떤 궁의 담 높이는 내게 충격이었다. 궁을 두르고 있는 담의 키는 창경궁의 몇배나 됐고, 그것도 안심이 안 됐는지 담의 주위를 해자(垓子)가 휘감고 있었다. 담장이라기보다는 성벽이라고 불러야 마땅했다. 궁 안의 나무 복도를 걸을 때 삐걱삐걱 소리가 나기에 물어봤더니 잠잘 때 자객이 침입하는 것을 알아채기 위해 일부러 그렇게 만들었단다. 긴장 때문에 하루도 발 뻗고 잘 수 없었던 봉건국가가 일본이었다.
이 긴장도의 차이가 100여년 전 우리를 식민지로, 일본을 동아시아의 강자로 가른 근인(根因)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동양의 힘으로는 서양에 맞설 수 없다는 불편한 진실이 대낮처럼 훤히 드러났을 때 일본은 스스로를 개조할 힘이 있었다. 무(武)의 긴장 속에서 칼을 갖고 있었던 젊은 사무라이들은 ‘위로부터의 쿠데타’를 일으켜 일본을 신속하게 변신시켰다. 반면 칼을 천대했던 문약(文弱)한 조선은 이러저리 휘둘렸고, 아름다운 왕궁의 담장 안은 동물원으로 전락했다.
문(文)을 숭상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선조들의 DNA는 세월이 흐르고 국체(國體)가 바뀌고 강산이 몇번을 변해도 우리의 피 안에 면면히 흐르는가 보다. 나라를 지키는 군함이 적의 공격에 무참하게 두 동강 나 46명의 아들들이 불귀의 객이 된 이후 우리가 보여준 태도는 우리의 삼엄함이 창경궁의 담 높이에서 한 치도 자라지 않았음을 웅변한다.
무력 보복은 또 다른 보복을 부를 것이란 이유로, 그리고 무력 이외의 방법이 더 효율적이라는 논리로 무력 응징을 제외한 응징들이 채택됐다. 그리고 사건 발생 6개월밖에 안 지난 지금 북한과 이제 그만 화해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가 어디선가 솔솔 들리기 시작한다. 가해자가 범행을 인정하지도, 사과하지도 않는데 피해자가 먼저 그만 털고 가자는 것은 어떤 나라, 어떤 국민들한테서도 찾아보기 힘든 우리만의 ‘이상한’ 정서다. 이런 특유의 정서에 대한 분석은 구구하지만, “잃는 게 두려워서”라는 게 가장 솔직한 이유인 것 같다. 휴전선이 시끄러워지면 주가가 떨어지고 아파트값이 떨어지고 군에 보낸 아들의 안위가 걱정되는 것이다.
미국 군함이 자기네 바다에서 멕시코 잠수정의 어뢰공격에 침몰했을 경우 미국이라면 우리처럼 했을까. 영국의 함정이 프랑스 어뢰에 격침됐을 경우 영국이라면 우리처럼 했을까.
정부는 여전히 북한의 천안함 사건 사과를 남북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고수하고 있지만 여론이 이른바 ‘출구전략’ 쪽으로 기운다면 선거로 뽑힌 정부는 당해낼 재간이 없을 것이다.
‘평화’나 ‘화해’ 같은 말은 그 자체로 아름답지만 나약함을 감추는 교언(巧言)으로 이용되면 그것처럼 추악한 단어도 없다. 이런 우리한테 정말 두려운 시나리오는 북한이 또 도발하는 것이다. 그때는 우리가 한번 더 참겠다고 할 명분도 없을 테고, 그렇다고 응전할 자신도 없을 텐데 어떻게 할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그래도 이런 ‘굴신(屈身)의 처세’ 덕분에 약소한 우리 민족이 스러지지 않고 반만년 동안 생명을 부지해온 것이라고 누군가 강변한다면 할 말이 없다.
162번 버스는 오늘도 창경궁을 스치고, 창경궁 담벼락엔 가을빛이 완연하다.
carlos@seoul.co.kr
2010-10-15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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