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무웅 문학평론가·영남대 명예교수
한국 정치의 살벌한 싸움터에 등장한 이후 문재인의 선한 눈빛과 겸손한 입매는 사실은 불안의 요인이었다. 정치꾼들의 술수에 예리하게 대응하지 못하는 그의 소박한 언변은 정치적 둔감으로 비쳐지곤 했다. 당내 경선 과정에서 그가 자신을 ‘고구마’에 비유한 걸 보면 그 자신도 그 점을 의식하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그런데 오늘 목격하는 것은 어떤 날렵한 재주도 한결같은 진정 앞에서는 무력하다는 ‘오래된 교훈’이다. 윤영수의 소설에서 제목을 잠깐 빌린다면, ‘착한 사람 문재인’의 대통령 당선은 납덩이에 눌려 살았던 국민들에게 모처럼의 거국적인 치유를 선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당선과 취임 전후 대통령 문재인에게서 발화된 언어들 가운데 나에게 가장 깊은 감명을 준 것은 다음의 것이다. 텔레비전 화면에 ‘확실’이 뜨고 나서 고무된 더불어민주당의 당사로 찾아간 그는 방송을 지켜보는 당직자들에게 이런 요지로 말했다. “간절함의 승리라고 생각합니다. 국민들의 간절함이 승리한 것이고 당원 여러분의 간절함이 승리한 것입니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는 이 발언을 듣는 순간 내 가슴에서는 지난가을부터 올봄까지 주말마다 버스나 전철을 타고 또는 걸어서 광화문에 나갔던 사람들의 마음에 담겼던 어떤 정의되지 못한 응어리가 바깥으로 꺼내어져 표현을 얻은 것 같은 전기 스파크가 일었다. 아, 저 사람이 그걸 알고 있구나. 자신의 당선을 위해 불철주야 헌신했던 운동원들의 마음에서도 그것을 읽고 거기에 감사하고 있구나. 모두들 더 나은 세상을 위한 간절함으로 뭉치고 있었구나.
물론 간절한 마음을 정치적 현실로 구체화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것은 현실의 복합성을 논리적으로 이해하고 실현 가능한 해결책을 다시 현실 속으로 투입하는 과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가 당면한 현실적 과제는 무엇인가. 이미 이명박 정권 초기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평생 쌓아 올린 공든 탑이 허물어지는 것을 보는 듯한 고통 속에서 민주주의의 후퇴, 민생경제의 악화, 그리고 남북 관계의 파탄에 대해 개탄한 바 있다. 그는 “민의를 따르지 않는 독재자는 민의로 퇴출시켜야 할 때가 되었다”는 말을 ‘김대중 자서전’에서 남겼고, 결국 그 말은 실현됐다.
하지만 아직은 노폐물을 제거한 데 불과하고, 민주주의도 알맹이는 빠지고 껍데기만 남게 될 온갖 위험들이 여전히 잠복해 있다. 명목과 실제의 일치가 구현된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헌법을 비롯해 정당제도와 선거제도 등 국민들 의사를 더 올바르게 대변할 수 있는 정치제도의 개혁이 절실하다. 민생경제의 지옥 같은 상황은 입에 담기도 괴롭다. 어떤 사람의 한 해 주식 배당이 1900억원인 데 비해 다른 사람들의 1년 소득이 1000만원도 안 되는 살인적 불균형을 어떻게 정의로운 사회의 이름으로 용납할 수 있겠는가.
지난 정권들이 외교, 안보, 통일 분야에서 계속해 온 무능과 무책임은 어느덧 한국을 동아시아의 ‘투명국가’이자 최악의 전쟁위험 국가로 만들었다. 문재인 정부는 한반도 평화의 전략적 주도권을 무엇보다 먼저 시급히 찾아와야 한다. 북핵 문제도 사드 배치 문제도 우리가 우리 운명의 주인이라는 견지에서 현명한 출구를 찾아야 한다.
그러나 이런 일들을 위한 정치와 정책의 성공 조건은 단순한 정략적 계산이 아니라 지극한 간절함을 바탕에 갖는 것이다. 더 나은 세상에서 평화롭게 살겠다는 민초들의 염원의 간절함에 지도자가 순종하는 것이다. 대통령 문재인은 이 간절함의 대열에 앞장서라.
2017-05-12 31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