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줄날줄] 금관의 예수/서동철 논설위원

[씨줄날줄] 금관의 예수/서동철 논설위원

입력 2014-08-16 00:00
수정 2014-08-16 0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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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에 오라고 해야겠지요, 역시?”/“뭐 말이요.”

“홍 막달레나 말입니다. 고해를 보겠답니다.”/“뭐하는 여자요?”

“창녀올시다.”/“창녀? 다음에 오라고 하시오. 헌금은?”

“많지 않습니다.”/“왜?”

“가난해서죠. 가난한 사람들이니까요.”

시인 김지하의 작품으로 알려진 ‘금관의 예수’는 이렇게 시작된다. 먼저 말을 꺼낸 사람은 수녀이고, 말을 받는 사람은 신부다. 배경은 1971년 겨울 소도시의 변두리 성당이다.

‘금관의 예수’에 관심을 가진 건 연극 때문이 아니라 김민기가 만들고 부른, 같은 제목의 노래 때문이었다. 학교 다니던 시절 종종 들었던 ‘금관의 예수’가 다시 궁금했지만 찾지 못하다가 지난해 이맘때쯤 누군가 유튜브에 올린 것을 발견했다. 이후 1978년판 대본을 읽어보았다. ‘얼어붙은 저 하늘, 얼어붙은 저 벌판’으로 시작하는 노래는 막이 오른 뒤 검은 옷을 입은 신부와 수녀가 말없이 서로를 노려보는 장면에서 들린다는 설정이다.

‘금관의 예수’의 1장 무대는 청회색의 음울한 하늘을 배경으로 예수상이 실루엣으로 보이고, 무대 중앙 탁자에는 검은 표지의 성서를 올려놓도록 대본은 지시한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공간에서 예수님이 내려다보는 가운데 이루어지는 성직자의 대화라는 것을 상징한다. 이런 교회이니 신자라는 건축업자는 한 푼만 달라는 걸인에게는 “내가 골이 비었냐”고 비웃음을 보내는 반면 예수상을 향해서는 “그 금관은 제가 낸 헌금을 골자로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달라”면서 “교회의 대소 공사를 맡겨주면 아예 전신을 금덩이로 만들어 드리겠다”고 ‘기도’한다.

‘금관의 예수’는 이렇듯 암울하던 1970년대 ‘낮은 곳’을 비추어야 마땅한 종교가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모습을 그렸다. 종교가 쫓겨난 사람들을 거두기는커녕 오히려 권력과 금력이 빌붙어 잇속을 차리는 데 열중하는 상황을 비판한 것이다. 이런 작품이 1973년 원주가톨릭회관에서 초연됐으니 당시는 종교의 자기반성이 통렬했음을 알 수 있다.

방한 중인 프란치스코 교황의 일거수일투족에 눈길이 모아진다. ‘낮은 곳’에 관심을 기울이면서 사랑이란 실천을 통해서만 구현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는 교황이다. 그런데 우리 사회의 ‘프란치스코 신드롬’을 보면서 아쉬움도 없지 않다. 그가 전하는 ‘사랑의 메시지’를 기다리기에 앞서 스스로 마음속 ‘금관의 예수’를 지우는 운동을 펼쳤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생각한다. 가톨릭만의 문제가 아니다. 모든 종교가 고민해야 한다.

서동철 논설위원 dcsuh@seoul.co.kr
2014-08-16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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