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과 막연한 믿음 교차하는 그리스

불안과 막연한 믿음 교차하는 그리스

입력 2010-02-07 00:00
수정 2010-02-07 0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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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사당과 재무부 빌딩이 있는 아테네 중심가 신다그마 광장 바로 옆 플라카 지역의 상가에는 불안감과 더불어 막연한 믿음이 교차하고 있다.

“두려운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리스는 항상 난관을 극복해왔다. 그렇게 믿는다. 그렇지만 어려움을 극복하느냐에 상관없이 언제나 서민들의 삶은 마찬가지로 어려웠다.”

한 커피숍에서 친구와 커피를 마시던 니콜라 야니스 씨는 이렇게 말했다. 자신은 식료품 가게에서 일하고 친구 스타브로스 씨는 보안업체에 다닌다고 소개한 그는 모두 대학 전공과는 상관없는 일을 하고 있다고 덧붙였다.

그리스, 스페인, 포르투갈 등 일부 유럽 국가의 채무불이행(디폴트) 우려를 키우며 유럽발(發) 금융위기를 불러일으킨 그리스 재정난에 대해 그리스인들은 혼란에 빠져 있다.

스타브로스 씨는 세금을 성실하게 신고하고 있는지를 묻자 고개를 저으면서도 “재정적자는 우리 같은 서민들 (탈세) 때문이 아니다. 부자들이 엄청나게 탈세하기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아테네의 부촌인 콜로나키의 개업 의사가 연소득을 면세점인 1만2천유로라고 신고했다는 언론 보도를 전하면서 이들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라고 말했다.

신문과 잡화를 파는 가판점을 운영하는 코스타스 소로바코스 씨는 비난의 화살을 전 신민당 정부와 유럽연합(EU)에 돌렸다.

“이전 신민당 정부가 오랫동안 야당을 하다가 집권한 뒤 국정을 잘못 운영해서 이렇게 됐다. 그리스를 (재정적자 통계를 부실 보고하는) 불량국가로 만들었다. 그리스는 EU 소속이다. 그러면 한가족인데 (잘못을) 까발리는 것보다 다독이면서 가야 하는 거 아니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재정난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10월 총선에서 승리한 사회당 정부의 게오르게 파판드레우 총리에 대한 지지는 아직 크게 훼손되지 않은 듯싶다.

그리스 최고 청취율을 자랑하는 민영 스카이 라디오방송이 여론조사업체 ‘퍼블릭 이슈’에 의뢰해 이날 공개한 여론조사 결과는 그리스인들의 복잡한 심정을 보여준다.

정부부채가 너무 많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고(94%), 이 문제에 대해 걱정하고 있지만(83%), 정부가 위기를 타개할 능력이 있고(62%), 정부의 재정적자 감축 계획인 ‘안정화 프로그램’이 효과를 낼 것이라고 믿고 있다(60%).

다만, 그리스가 스스로 이 문제를 감당할 수 있겠느냐에 대해선 그럴 것(52%)이라는 기대와 그렇지 못할 것(46%)이라는 우려가 엇갈렸다.

물론 스스로 감당하지 못할 경우 가판점 주인인 소로바코스 씨처럼 EU가 도울 것이라는 기대도 자리하고 있다.

아테네 국제공항(엘레프쎄리오스 베니젤로스)에서 일하는 코스타스 씨는 “국가부도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이 문제가 그리스만의 문제가 아니다. 스페인, 이탈리아 등 유로존 공동의 문제이기 때문에 유로존이 도와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리스 국민도 유류세 인상과 연금수령 연령을 65세에서 67세로 높이는 계획에 대해선 강한 거부감을 드러내 정부의 재정적자 감축 계획이 제대로 이행될지에 대한 의문은 여전했다.

반면 오는 10일로 예정된 공공노조연맹(ADEDY) 파업 등 노동계의 강경 대응은 국민에게서 공감을 얻지 못하고 있다.

공무원 수당 삭감과 임금동결에 대해 70%가 찬성했다. 그리스인에게 좋은 자리에 있는 공무원은 ‘놀고먹는 사람들’로 인식돼 있다는 얘기다.

독일 지멘스 현지법인이 고위공직자들에게 리베이트를 제공한 스캔들, 수도원에 정부재산을 매각하면서 부정이 저질렀다는 등 대형 부패 스캔들 뿐만 아니라 아무리 수술이 급해도 뒷돈을 줘야 제때 수술을 받을 수 있다는 경험들이 공무원 사회에 대한 이러한 불신을 축적시킨 셈이다.

물론 공무원들도 항변하고 있다. 오랫동안 사회주의 정권이 집권해온 그리스는 공공부문 비중이 다른 국가에 비해 상대적으로 높다.

아테네 국제공항에서 배관공으로 일하는 드미트리스 씨는 “임금이 줄어드는 것은 물론 일자리를 잃을까 걱정”이라며 “공무원 중에도 우리처럼 어렵고 힘든 일 하는 사람들의 파업은 정당하다. 그러나 좀 더 좋은 직종에 있는 사람들의 파업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공공노조연맹(ADEDY) 소속 노조원인 버스기사 페트로스 씨는 “정부가 엉뚱하게 돈을 빼먹은데 대해 화가 치민다. 또 보채는 집단에는 돈을 퍼주는 것도 맘에 안 든다”며 오는 10일 예정된 파업에 참여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또다른 공무원인 코스타스 씨는 “그리스에서 파업은 대개 노조지도부의 이익 때문에 일어난다. 그런 파업은 옳지 않다”고 말했다.

그리스는 경쟁력 있는 산업이 관광 이외에 그리 많지 않고 EU 회원국가 중 상대적으로 투명성이 크게 떨어진다. 현장에서 만난 아테네 시민들은 부패와 탈세가 만연한 사회 분위기와 투명하고 공정하게 진행되지 못한 공공부문 비대화의 문제점이 개선되어야 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러나 이로 인해 빚어진 위기는 의식하면서도 일단 생활의 절박함 때문인지 저마다 ‘남탓’을 먼저 하고 ‘내 밥그릇’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는 의식을 드러내 정부의 긴축정책과 구조조정 추진이 쉽지 않을 것으로 느껴졌다.

이러한 분위기는 공공부문 개혁 못지 않게 재정난 해결에 중요한 연금개혁에 관한 설문조사에서도 드러나 있다. 노동부장관이 2015년부터는 연금을 못 주는 상황이 될 것이라고 말했고, EU 집행위원회도 연금개혁을 권고했으나 여론조사 결과 연금 연령 상향조정 거부감이 높아 정부가 고심 중이다.

한편, 정부의 이른바 ‘숨겨진 빚’이 그리스 재정난 사태 전개에 또 다른 변수가 될 전망이다. 정부, 노조대표, 학계 등이 참여해 구성한 조사위원회는 최근, 병원빚 등 장부에는 없지만 정부가 갚아야 할 숨겨진 빚이 250억유로라는 조사 결과를 국회에 제출했다. 그리스의 현재 정부부채가 2천700억 유로(GDP의 116%) 수준인 것을 감안하면 적지않은 규모다.

플라카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요르고시 미트랄리 씨는 “파판드레우 총리가 그의 조부(요르고시 파판드레우 전 총리)의 명예를 실추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할 것이다. 그의 조부는 1963년 무상교육과 농민 연금을 실시했다”며 총리에 대한 강한 믿음을 보였다.

국민의 높은 지지를 받고 있는 파판드레우 총리가 노동계의 반발, 금융시장의 불신 등을 어떻게 설득하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지 주목된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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