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 디스토피아로 묘사하고 외국을 일자리 빼앗은 약탈자 지목…국수주의의 매니페스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0일(현지시간) 취임사를 통해 선동과 포퓰리즘, 대결로 점철된 대선 캠페인식 국가운영 구상을 분명히 했다.‘트럼프 시대’ 이전의 미국을 기득권자가 쌓은 적폐가 가득한 ‘살육’의 디스토피아로 묘사하고 동맹을 포함한 외국을 미국의 부와 파워를 앗아간 약탈자로 지목하는 분열적 인식을 거듭 드러냄으로써 구시대와의 단절이라는 소명을 부여받은 일종의 구세주로 자신을 매김하면서다.
16분에 걸친 트럼프 취임사는 원조 포퓰리스트로 불린 대중 선동가였던 7대 앤드루 잭슨 대통령 이래 국정의 연속성을 부정한 첫 매니페스토(선언)로 지적된다.
조국 미국과 세계의 실상을 묘사하면서 사용한 ‘살육’(carnage), ‘고갈’(depletion), ‘황폐’(disrepair), ‘슬픈’(sad) 등 트럼프 대통령이 선택한 언어는 역대 미 대통령 취임사에서 찾아볼 수 없는 비관적이고 자극적인 수사로, 비록 ‘국민 대변’으로 포장됐지만 그 자체로 공허한 포퓰리즘과 국수주의적 선동 문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대중주의자를 자처한 만큼 기득권과 외국인에 대한 줄기찬 공격을 내세워 지지기반인 백인·저학력·남성들과 직접 소통하는 미증유의 트럼프식 분열 정치가 예고된 셈이다.
먼저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미 사회가 만연하는 범죄와 만성적 가난, 부서진 학교, 빼앗긴 부, 묘비처럼 흩어진 녹슨 공장들”로 가득하다며 “이 미국의 살육은 당장 여기서 멈춰야 한다”고 선언했다.
미국 사회를 암울한 디스토피아의 도살장으로 규정한 것이다.
그러면서 워싱턴의 엘리트들로부터 권력을 빼앗아야 이러한 살육의 시대가 종언을 고할 수 있다는 주장으로 나아갔다.
“너무나 오랫동안 수도 워싱턴DC의 소수 그룹이 정부의 보상을 챙겼다. 국민은 그 비용을 치렀다. 워싱턴은 번창했다. 그러나 국민은 그 부를 갖지 못했다. 정치인들은 번영을 누렸다. 그러나 일자리는 떠났다. 공장은 문을 닫았다. 소수 기득권세력의 승리는 국민 여러분의 승리가 아니었다”는 명료한 대결의 메시지도 보탰다.
또 “공허한 말의 시간은 끝났다. 이제 행동의 시간이 도래했다”, “고통을 겪은 미국인 가정에 권력을 돌려주겠다”, “오늘은 워싱턴DC에서 국민에게로 권력을 이양하는 날” 등 날 선 수사로 워싱턴 정치권을 ‘기득권세력’으로 공박하고 ‘새 시대’를 열자고 호소했다.
이어 트럼프 대통령은 “우리는 새로운 강령을 내놓는다. 새로운 비전이 우리 땅을 다스릴 것이다. 오늘부터 오로지 미국이 우선, 미국이 우선”이라며 ‘아메리카 퍼스트’, 즉 ‘미국 우선주의’를 복음처럼 선포했다.
WP는 “사나운 국가주의적 선언”이라며 “어두운 취임연설에서 트럼프는 오로지 미 국민에게만 충성서약을 함으로써 현대의 가장 추한 선거가 남긴 후유증과 분열을 치유하는 대신 영원히 정치 캠페인을 잇듯이 국정을 운영하려 한다”고 지적했다.
‘미국 우선주의’의 메시지는 “미국 제품을 사고 미국인을 고용하라”는 단순하지만 분명한 그의 요구에 집약돼 있다.
특히 그는 “우리가 다른 나라를 부유하게 했다. 반면 우리나라의 부와 힘, 자신감은 지평선 너머로 사라졌다. 공장들은 하나둘 문을 닫거나 우리나라를 떠나고 수많은 노동자는 뒤에 남게 됐다. 우리 중산층의 부는 빼앗겨 전 세계에 흩어졌다”는 주장으로 미국의 노동자의 박탈감을 겨냥했다.
또 “무역과 세금 이민, 외교에 관한 모든 결정은 미국인 노동자와 가정에 이익을 주기 위해 이뤄질 것”이라며 “우리의 물건을 만들고, 우리의 기업들을 도둑질하며, 우리의 일자리를 파괴하는 다른 나라들의 약탈 행위로부터 우리의 국경을 보호해야만 한다”며 전형적인 국가주의를 선언했다.
‘미국 우선주의’의 실체가 미국의 이익만을 위한 보호무역주의와 동맹국에 대한 방위비 분담금 인상 요구, 글로벌 기업압박을 통한 일자리 만들기 등 카우보이식 권력 행사가 될 것임을 시사한 것이다.
그의 선동적 취임사에 대해 스티브 배넌 백악관 수석전략가는 “트럼프 대통령의 포퓰리스트적이고 일종의 국가주의적 운동의 기본 원칙을 날 것 그대로 선언한 것”이라며 “앤드루 잭슨 대통령 이래 이런 연설은 없었다. 매우 깊고 깊은 애국주의의 뿌리가 있다”고 주장했다.
우파 선동가로 지목되는 배넌은 트럼프 연설문 작성의 조력자로 알려졌다.
월스트리트저널은 “취임사라기보다는 집회에서 나올 연설이었다”고 평가절하했고, LAT는 “대선 수사의 재탕으로 트럼프의 상투적 문구들을 모아놓은 ‘베스트 음반’”이라고 비판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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