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임시 왕궁 경주 명활산성 속살 드러내

신라의 임시 왕궁 경주 명활산성 속살 드러내

입력 2013-12-02 00:00
수정 2013-12-02 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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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문화재연구원, 북문터·치성 등 확인

신라가 수도 경주 외곽에 쌓아 주로 왜적에 대비하는 데 활용했고 왜구가 극성을 부린 5세기말 지바왕-소지왕 무렵에는 임시 왕궁으로 활용한 명활산성(明活山城)이 발굴조사 결과 신라 성곽의 위용을 보여주는 속살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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속살 드러낸 경주 명활성
속살 드러낸 경주 명활성 발굴조사 결과 구조와 위용을 드러낸 경주 명활산성. 사진은 북문터 일대 발굴 전경이다.
계림문화재연구원 제공
매장문화재 전문 조사기관인 계림문화재연구원(원장 남시진)은 경주시가 추진하는 명활산성 종합정비계획 일환으로 지난 6월 이래 명활산성(사적 47호) 구역 중 북문터라고 추정되는 곳 일대를 발굴조사한 결과 문터와 성곽 일부를 외부로 노출시킨 시설인 치성(雉城), 성문으로 진입하기 위한 석축 구조물 등을 처음으로 확인했다고 2일 밝혔다.

조사단은 이런 구조가 5세기 무렵 신라가 쌓은 산성들인 충북 보은의 삼년산성(三年山城)이나 경북 문경의 고모산성(姑母山城)과 일치한다면서 “다른 데서 본 신라 성곽의 특징과 장대한 규모가 이곳에서도 그대로 드러난다”고 덧붙였다.

또한 북문터 양쪽 측벽에서는 평기와와 철판, 쇠못 등의 유물이 다량으로 확인됨으로써 이곳에 나무문을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문터 동서 끝단에서는 나무 기둥을 바닥과 고정하는 철기인 확쇠가 출토됐다.

치성은 반원형으로 만든 것으로 밝혀졌다.

조사단은 “이런 반원형 치성이 신라 왕경인 경주에서 처음으로 확인된 점에서 이번 조사 성과는 학술 가치가 매우 크며, 이는 앞으로 명활성 정비에서도 중요한 기초 자료를 제공했다”고 평가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명활성을 처음 쌓은 시기는 확실치 않지만 실성왕 4년(405)에 이곳에서 왜구를 물리쳤다는 기록을 통해 처음 등장한다. 이로 보면 명활성은 4세기 이전에 쌓은 셈이 된다.

이후 왜구 침입이 극심하자 신라는 자비왕 18년(475)에 이곳으로 왕궁을 옮겼다가 소지왕 10년(488)에 다시 월성으로 돌아왔다는 기록이 확인됐다.

또 선덕왕 16년(647년)에 발발한 신라사 유명한 사건인 비담과 염종의 반란군이 그 근거지로 이곳을 활용하다가 김유신에게 일망타진된 일도 있었다.

명활성은 신라사에서 이처럼 중요한 역사성을 지닌 곳임에도 그간 그 성격 구명을 위한 발굴조사는 거의 없었다. 1989년 한반도를 강타한 태풍 셀마에 성벽 일부가 붕괴되자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복원을 위한 긴급 발굴조사를 벌인 일이 고작이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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