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배급사 엄용훈 대표 “불통의 시대”
극장 체인을 가진 대기업 CJ E&M이 투자·배급한 영화 ‘국제시장’이 누적관객수 1천만을 넘으며 축포를 쏘아 올릴 때 영화계 한쪽에서는 중소배급사의 대표가 영화 흥행 실패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의를 표하는 일이 벌어졌다.표면상 이유는 흥행 실패지만 그 이면에는 사실 대기업의 ‘수직계열화’에 따른 불공정 행위가 자리하고 있다.
영화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을 배급한 리틀빅픽쳐스 엄용훈 대표는 15일 연합뉴스와 한 통화에서 “(대기업 극장들이) 네가 아무리 외친다고 한들 너에게는 절대 극장을 주지 않을 거야 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며 리틀빅픽쳐스 대표직을 그만두겠다고 밝혔다.
엄 대표는 “사면초가에 빠져 있다는 느낌을 많이 가졌다”면서 “귀 닫고 눈 가리고 아무것도 들으려고 하지 않는 불통의 시대에서 영화를 하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고 말했다.
2013년 설립된 배급사 리틀빅픽쳐스는 대기업 중심으로 전개되는 영화계의 불합리한 제작 환경을 개선하고 공정한 영화 유통 환경을 조성하고자 명필름, 삼거리픽쳐스, 영화사청어람, 주피터필름, 외유내강 등 유수의 영화 제작사들이 공동 투자해 만든 회사다. 그동안 ‘소녀괴담’, ‘카트’,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 등을 배급했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과 ‘도가니’(2011) 등을 제작한 삼거리픽쳐스 대표이기도 한 엄 대표는 전날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제작자로서 관객 여러분께 영화를 골라볼 수 있게 한다는 현재의 멀티플렉스 시스템에서도 먼 길을 찾아다니며 보게 해야 하는 불편과 수고를 끼쳤다”고 말했다.
이어 “그동안 함께 고생한 수많은 스태프와 배우들에게 실패한 작품에 참여하게 했다는 큰 실망감을 안겨줬고, 결과를 예측하기 어려웠던 이 작품에 용기와 응원의 마음으로 투자를 결정해 줬던 투자자에게 경제적으로 큰 손실과 큰 시름을 겪게 했다”며 착잡한 심경을 밝혔다.
엄 대표는 “많은 분에게 큰 죄를 지었다”면서 리틀빅픽쳐스 대표 외에 한국영화제작가협회 부회장, 서울영상진흥위원회 부위원장 등 영화계에서 자신이 맡은 직책을 모두 내려놓고 제작자의 신분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했다.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은 미국의 여류작가 바바라 오코너가 쓴 동명의 베스트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로, 영화를 본 관객의 호평이 이어지며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 등을 통해 상영관 확대 요청이 잇따르고 있다.
개그맨 박휘순을 비롯해 가수 타블로, 배우 김수미·진구·임원희 등이 자발적으로 극장을 대관해 상영회를 열었으며, 다음 아고라에서 상영관을 늘려달라는 서명 운동이 벌어지고 했다.
하지만 이런 요청에도 지난달 31일 205개 스크린으로 시작한 이 영화의 상영관은 계속 줄어 14일에는 상영관이 23곳에 불과했다. 순제작비 25억원을 들인 이 영화의 손익분기점은 110만명이다.
이 영화에 노부인 역으로 출연한 배우 김혜자도 최근 연합뉴스와 한 인터뷰에서 “좋은 영향을 끼치는 영화인데 상영관이 없어서 관객이 영화를 못 본다는 것은 부당하다”며 대기업의 ‘수직계열화’ 문제를 에둘러 비판한 바 있다.
영화계 한 관계자는 “’국제시장’과 ‘개를 훔치는 완벽한 방법’의 모습은 한국 영화계의 명암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라며 “서점에서 베스트셀러만이 아니라 사전도 팔 듯 장기적으로 봤을 때 영화에 단순히 상업 논리만 적용하는 것은 문제”라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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