낮은곳 부박한 삶과 소통하기

낮은곳 부박한 삶과 소통하기

입력 2010-05-15 00:00
수정 2010-05-15 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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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나미 새 소설집 ‘수상한 하루’

이나미(49)가 6년만에 내놓은 소설집 ‘수상한 하루’(랜덤하우스 펴냄)는 우리네 삶이라는 게 곰팡이 냄새 풍기는 눅눅한 옥탑방처럼 얼마나 비루한 것인지 보여준다. 어렵사리 마련한 횟집이 망한 뒤 인터넷으로 여자 낚을 궁리만 하는 남자(‘집게와 말미잘’), 조악한 중국제 물건을 파는 지하철 잡상인(‘자크린느의 눈물’), 박사과정까지 마치고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는 고학력 여자 백수(‘지상에서의 마지막 방 한 칸’), 드라마 단역 출연으로 생계 잇는 여자, 그리고 군대 고참들의 성폭행에 시달리는 동생(‘푸른 푸른’) 등…. 소설집에 담긴 9편의 작품마다 어쩌자고 한결같이 낮은 곳에 있는 부박한 삶에 시선을 고정시켜 놓은 것일까.

198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나미는 꼬박 22년의 시간 동안 장편소설 둘(‘실크로드의 자유인’ ‘우리가 사랑한 남자’), 단편소설집 둘(‘얼음가시’ ‘빙화’)을 펴냈을 뿐이다. 서울예대 문예창작과를 나온 뒤 러시아에서 다시 문학 공부(고리키 문학대학 졸업)에 매진한 탓도 있겠다. 덕분에 그의 소설은 ‘여성적 대륙성’의 경지로 확장될 수 있었다. 그는 “타인들의 고통을 외면하지 못해 가슴앓이를 한다. 사람들 간의 복잡다단한 갈등과 절망, 상처, 은폐된 진실을 들춰내 궁극적으로 상호 간의 소통과 구원을 모색하는 것이 소설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집게와 말미잘’ 속 남자는 현실의 윤리를 뛰어넘는다. 자신을 부풀려서 소개한 뒤 현실을 벗어나고픈 환상 속에 사는 여자를 유혹한다. 엽기적인 토막살인을 저지르게 되는 것은 어찌보면 필연에 가깝다. ‘자크린느의 눈물’ 속 지하철 잡상인 또한 대구 지하철 참사로 원통함이 사무쳐 이승을 뜨지 못한 채 넋으로 역 주변을 떠돌 수밖에 없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희망을 품지 못한다면 모두 부질없는 일이 된다. ‘모시 바구니’의 딸은 냉랭한 남편과 정리하고 어머니와 새로운 가족공동체를 꿈꾸고, ‘지상에서의 마지막 방 한 칸’ 속 고학력 백수는 끝내 죽어버린 애완용 거북이의 마지막 눈빛에서도 희망의 근거를 찾는다.

박록삼기자 youngtan@seoul.co.kr

2010-05-15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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