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라위 에이즈 고아 돌보러 가는 성악가 김청자
2005년은 재직하던 대학의 안식년이었다. 만 60세. 다가올 노후를 특별하게 보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친구의 초청으로 유럽과 미국, 아프리카를 여행했는데, 검은 불행의 대륙 아프리카에서 살아가고 있는 이들을 보며 뼈저린 고통을 느꼈다. 관광 차원의 여행이었지만, 그해 1월과 10월에 두 번 더 갔다. 마음으로부터 모종의 소명감이 일기 시작했다. 수녀, 신부, 승려, 목사 등 교파를 초월한 성직자들이 아프리카 대륙 곳곳에서 그들의 불행을 함께하고 있었다.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메조 소프라노 김청자 교수. 그는 이제 검은 불행의 대륙 아프리카에서 가난과 질병으로 고통받으며 살아가는 어린이들을 위해 제2의 인생을 설계해 나아가고 있다.
다음해엔 모잠비크에 갔다. 마치 무엇엔가 중독된 것처럼, 남아프리카공화국, 잠비아 등 지금까지 아홉 차례 아프리카행 비행기에 올랐다. 말라위는 2008년 1월과 2009년 9월에 방문했다. 아프리카의 대부분 국가들이 그렇듯이 말라위 역시 작고 가난한 나라였지만 사람들의 품성이 온유했고, 주변국들에 비해 비교적 평온을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무엇보다도 영어로 어느 정도의 의사소통이 가능하다는 점이 활동하기에 편할 것 같았다. 말라위에서 함께 일하기에 적당할 공동체를 찾는데, 미국 가톨릭 재단에서 후원하는 12년 된 루수빌로(희망) 재단을 만나게 되었다. 40년을 국내외의 무대 위에서 공연하고, 교육자로 제자들을 양성해 온 성악가 김청자 선생의 ‘인생 제2막’의 서막이었다.


“말라위에는 전체 인구의 10%에 이르는 100만 명의 에이즈 고아들이 있어요. 저는 루수빌로 재단의 자원봉사자 겸 후원자로 그곳에서 9,000명의 고아들을 돌볼 계획입니다. 그 아이들 대부분은 재단 후원을 받고 있는 아이들의 친척들이 보살피지만 그럴 친적마저 없는 100여 명의 아이들은 재단에서 운영하고 있는 고아원에서 지내고 있어요. 영혼 맑은 그 아이들이 더 이상 불행해지는 걸 바라보고만 있을 수가 도저히 없었어요.”
그 아이들의 눈빛이 선생을 닮지 않았을까.
“늦어도 올 8월 전까지는 모든 걸 정리해서 아프리카로 떠날 계획입니다.”


후원회 ‘아프리카 사랑’의 기금으로 모잠비크에 판 우물가에서.
선생의 고향은 강원도 춘천. 그곳에서 중학교까지 다녔고 열한 살 때 영세를 받았다. 선생이 음악을 시작하게 된 동기도 아일랜드 선교사들이 부여해 주었다. 성당의 구석방에서 음악을 좋아하는 아이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받게 해준 거였다. 선생은 이때 배운 피아노 실력으로 성가대 반주를 했고 음악을 하겠다는 꿈을 키웠다.
“음악이 하고 싶다고 아버지를 졸라 고등학교 때 서울로 왔어요. 외가에서 고등학교에 다녔죠. 가정 형편이 피아노와 성악 레슨을 받을 수 없는 실정이어서 혼자 작곡 공부를 하면서 음대 진학 준비를 했어요.”
“한양대학교에 음대가 막 생겼는데, 콩쿠르 1등에게는 전액 장학금을 준다고 했어요. 혼자 공부한 작곡 부문에서 1등이 없는 2등밖에 못 했죠.”
선생은 이때 다시 한 번 신부님과 후원자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분들의 도움으로 독일로 유학을 갈 수 있었다. 한 사람의 성공에는 본인의 능력이나 노력도 중요하지만 이처럼 많은 이들의 도움과 애정이 필요한 것인지 모른다. 독일의 아우스부르크 레오폴드 모차르트 콘서바토리움에서 피아노와 성악을 공부하고 오스트리아 빈 국립음학대학에 진학했다.
1970년 스위스 베른 시립오페라단이 공연한 오페라 <티토왕의 자비>에 출연, 선생은 유럽 무대에 선 한국인 최초의 성악가가 되었다. 1972년에 귀국, 국내 무대에서 활동하다가 다시 유럽행 비행기를 탔다.
“비행기 표 한 장 달랑 들고 유학하던 독일로 돌아가서 무대에 섰지요. 참 바쁘게 살았던 시기였어요. 바그너와 리하르트 슈트라우스 같은, 동양인들이 온전히 소화해 내기가 어려운 후기 낭만파 작품들의 드라마틱 메조소프라노로 인정받았어요.”
테이블 맞은편에서 간간이 찻잔을 입에 가져가는 선생의 눈길이 아득한 지난 시간들을 더듬었다.
“1993년에 예술의전당에서 초청공연을 했고, 그 이듬해 한국예술종합학교의 교수로 초빙돼 한국으로 돌아왔어요. 성악가로 무대에 서는 일도 중요하지만 후학들을 양성하는 일도 의무의 하나로 여기고 있었는데, 바람이 이루어진 거예요. 하지만 사람의 삶이라는 게 늘 좋은 일만 있을 수 없는 것이 남편과 헤어지는 아픔도 겪었었지요.”
한국에서 3년을 살았던 선생의 아들 다니엘은 창의성과 재능을 겸비한 차세대를 이끌 재즈색소폰 주자로 독일에서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베를린 음대에서 작곡을 전공하고, 재즈와 클래식을 하는 친구들로 결성한 오케스트라 ‘안드로메다’를 데리고 2008년엔 한국 초청연주회도 가졌다. 그때 그는 자신이 작곡한 곡을 어머니인 선생과 한 무대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작년 12월 21일에 재직하던 한예종 음악원의 오케스트라 정기 공연에서 구스타프 말러의 3번 심포니 중 4악장의 알토 솔로로 정년퇴임 기념 무대를 가졌던 선생은 일생 동안 몸담아 왔던 음악 무대에서 내려섰다.
“앞으로도 자선음악회와 같은 무대에는 기회가 닿으면 설 생각이에요. 이제부터는 제 삶의 목적이 달라졌다는 게 무엇보다 중요하겠죠.”


아프리카 아이들과 함께 환하게 웃는 김청자 교수.
“이 집은 조용하게 남은 삶을 보내고 싶어서 10년 전에 장만한 건데, 아프리카로 가려고 생각하니 이것 또한 짐이에요. 내가 가진 걸 다 내려놓고 가야 하겠구나 싶었어요.”
선생은 유일한 재산인 한 채 집마저도 팔려고 내놓았다. 집을 판 돈 또한 아프리카 후원기금으로 쓰려 하신다고 한다.
선생은 그동안 후원회 ‘아프리카 사랑’의 기금으로 모잠비크에 열 개의 우물을 파 주었다. 한 개의 우물을 파는 데 드는 비용은 미화 약 8천 달러. 적지 않은 돈이다.
아프리카에 가면 선생은 교육 문제 해결에 주력할 것이라 한다.
“아프리카가 우리나라의 옛 시절처럼 어렵지만 우리나라와 다른 점은 토대가 튼튼하지 못한 겁니다. 우리나라는 역사 문화적인 토대가 튼튼해서 쉽게 일어설 수가 있었지만 아프리카는 그렇지가 못해요. 낙후되어 있는 현실을 체감할 수가 있어요. 하지만 그곳 사람들도 이제는 문화에 대한 갈망을 갖기 시작했어요. 초, 중학교는 있지만 특별한 아이들을 제외하면 혜택을 받지 못해요. 학교를 세워 교육을 통한 리더를 발굴하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게 아닌가 여겨져요.”
마음먹기는 쉬워도 이를 삶을 통해 실천하는 일은 결코 쉽지가 않다는 것을 우리는 모두가 안다. 성악가 김청자 선생의 결단이 더욱 값지게 보이는 이유다.
“음악가로서의 삶은 이제 다 이루었다는 생각이 들어요. 건강하게 제가 꿈을 이룰 수 있게 해준 세상과 하느님께 늘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멈출 때를 알아야 하고,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한 분별을 할 줄 알아야 할 나이가 이제 겨우 된 거예요.”
머지않아 아프리카로 제2의 생을 살기 위해 떠나시는 성악가 김청자 선생. 선생의 등 뒤에서 한없이 손을 흔들어 드리고 싶다.
글_ 최준 기획위원·사진제공_ 김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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