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배우 명무대] 안석환의 <웃음의 대학>

[명배우 명무대] 안석환의 <웃음의 대학>

입력 2010-10-03 00:00
수정 2010-10-03 11: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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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열전 2’의 하나로 공연된 <웃음의 대학>(미타니 코우키 작, 이해제 연출)은 이미 500회 공연을 넘긴 흥행작이다. 2008년 11월 초연 때도 2주 연장 끝에 3만 명의 관객을 동원하는 놀라운 기록으로 막을 내렸다고 주최 측은 자랑한다. 문자 그대로 희극인데, 사회적 의미를 읽어낼 때, 그 의의가 더욱 깊어진다.

연극이 시작되면 달력이 쇼와 15년 10월 1일을 보여준다. 쇼와 15년(1940년)은 공연히 채택된 것이 아닐 듯싶다. 이는 1937년 7월 7일, 노구교사건을 빌미로 일본이 중국을 침공한 중일전쟁의 여파로 사상통제가 공공연해진 시기에 속한다. 즉, 1937년 8월, ‘국민정신총동원 실시요강’이 각의에서 결정되고, 10월에는 ‘국민정신총동원중앙연맹’이 결성되었던 것이다. 1940년 11월에는 신체제운동의 물결 속에 6만여 단체, 481만 명을 산하에 둔 ‘대일본산업보국회’가 발족되었다. 이와 같이 전시색이 짙어가는 중에 에노켄, 롯빠의 희극이 인기를 모으고, 디아나 다빈의 <오케스트라의 소녀>가 공전의 관객 동원을 기록하기도 했지만, 이 분야에서도 정부의 통제망은 점차 좁아졌다. 1940년 8월, 문부성은 학생, 생도의 영화, 연극 관람을 토요일, 일요일에 한정한다는 지시를 엄달하는가 하면, 9월에는 만담 중에 독부(毒婦)이야기 등의 구연을 금지했고, 10월에 들어서자 댄스홀의 영업을 금지시켰다. 그런가 하면 독일, 이탈리아, 일본의 삼국동맹이 조인된 것이 동년 9월 27일인데, 이 동맹은 영미에 대한 저항세력의 구축이라는 의미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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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연극은 실제로 17세기부터, 특히 메이지 시대 이래로 대중오락의 중심지로 번성했던 아사쿠사의 수많은 연예장과 희극인을 1940년대에 이르러 장악했던 극단 에노켄에게 바치는 진혼곡의 의미도 곁들인다. 에노모토 켄이치의 애칭을 딴 극단의 작가 키쿠야 사카가 이 연극의 작가(츠바키 하지메)의 모델인 바, 그는 혹독한 검열 속에서도 에노켄의 코미디를 뒷받침하다가 전성기에 군에 징집되어 35세의 나이로 전사했다.

작품은 ‘웃음의 대학’이라는 극단이 세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을 패러디한 극본을 공연을 위해 검열관에게 제출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 검열관은 연극에 대해 문외한일 뿐더러 전시, 아니 성전(聖戰) 중에 귀축의 나라 작가가 쓴 우스갯거리를 예술이랍시고 공연하려는 극단과 작가가 도무지 못마땅하다. 어떻게 해서든지 트집을 잡아 공연 허가를 내주지 않으려는 검열관과 어떻게 해서든지 트집을 피해 공연 허가를 받아내려는 작가 사이에 1주일에 걸친 공방이 연극의 전부이다. 그러면서도 거기에는 심지어 연극에 대한 문외한에 의해서도 지적되는 연극적 허구의 상습적인 맹점들에 대한 비판 역시 잠재되어 있어 흥미롭다. 말하자면, 관객 입장에서의 관점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연극이론이 도사리고 있는 셈이다. 그런가 하면, 표면적으로는 당국의 지시에 맹종하는 듯하면서도 작가의 징병명령에 직면하여 공연이 불가능해진 사태에 이르러 그간에 손질된 직품을 그가 살아 돌아올 때까지 보관하겠다는 온정을 보인 검열관을 통해 개인보다는 체제 비판이 우선된다는 변명도 엿보여 역설적이다.

두 사람만이 출연하는 2인극이기에 출연자의 비중이 그만큼 클 수밖에 없다. 나는 안석환이 출현하는 공연을 보았는데, 작품의 성격상 엄격성이 오히려 희극성을 불러일으키는 연기에 대한 안석환의 능숙함이 기대되었기 때문이다. 기대는 충족되었고, 관객들은 공연 내내 웃음으로 시종했다. 그의 연기에 대한 기대는 <고도를 기다리며> <가시고기> 그리고 무엇보다도 <리차드 3세> 등을 통해 그가 더스틴 호프만에 비견될 만한 연기자임을 알고 있었기에 생겨난 것이다. 크지 않은 체구에 거의 멍청해 보일 정도의 사람 좋은 표정이 표준적이지만, 작품의 요구에 따라 표변하여 잔인성을 드러낼 수 있는 폭발력을 보이기에 한국의 대표적인 연출가들과의 공동 작업이 가능했을 것이다. 이번 공연을 연출한 이해제는 일본과의 교류가 활발한 편인데, 검열관과 작가 사이를 톰과 제리처럼 꾸며보겠다는 자신의 의도에 충실했다. 안석환 자신은 이에 검열관과 작가는 적수이자 친구이기에 두 사람이 한 몸처럼 보이도록 할 것이라고 응수했는데, 그와 같은 의기투합이 적중한 셈이다.

안석환을 인터뷰하면서 그를 집중 분석한 기사(《씨네21》, 2000년 3월 14일자, 이영진 기자)가 있어 이를 바탕으로 그의 면면을 살피기로 한다.

안석환은 1959년 경기도 파주에서 태어났다. 유난히 키가 작고 병약한데다 내성적이고 성적도 별로 좋지 않아 아이의 아버지는 7대독자로서 종손인 형만 감쌌다. 하여 태권도 유단자인 형에게 그는 별 이유 없이 얻어맞아도 감히 대들지 못했다. 학교생활에도 재미를 느끼지 못해 그의 성적은 바닥 쪽에 가까웠다고 한다. 대경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79년에 단국대학교 경영학과에 입학했지만, 애초부터 전공에는 별 관심이 없었던 그는 매일 술 마시고 그럴싸한 진리를 설파하는 극예술연구회의 선배들 틈에 끼어 실험극장이나 명동의 창고극장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그 추억을 안고 군대에 갔다 제대하고 돌아와 보니 몰락한 가정형편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특송회사 간부였던 형의 도움으로 취직을 했다. 그 회사가 안석환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월급 받으며 일했던 곳이다. 5년만 기다려달라고 집에 통보한 뒤 찾아간 곳이 신촌의 연우무대. 1989년 <달라진 저승>으로 데뷔했다. 남들은 2시간 연습할 때 8시간 연습해서 연우무대의 개성적인 연기자 중 한 사람으로 불리다가 그가 비약의 시기라고 자평하는 1994년에 <고도를 기다리며>를 만나 생전 처음 인터뷰도 해보고, 그 이후로는 무대에서 주연만 하게 된다. 1995년에 <이 세상의 끝>, 1997년 <남자충동>으로 국내외에서 상도 많이 받았다.

그러면서 1992년에 개봉한 이장호 감독의 <명자 아키코 소냐>를 시작으로 여러 편의 영화에도 조연으로 출연한다. 영화나 TV에서는 이른바 조연배우로 더 유명한데, 그의 직업관은 비교적 분명하다. 예컨대 《세기말》의 요요사내는 캐릭터 자체가 한 패턴대로 쭉 가는 모노톤의 역이었지만, 스스로 ‘연기는 모노톤으로 비쳐져선 안 된다’고 생각해서 눈동자의 초점 자체를 아예 흐려놓았는데, 폐인 같고 무섭게 보이되 행동은 최대한 천천히 함으로써 망치로 내리칠 듯 더 섬뜩할 것 같아서였다고 할 정도로 그는 인물 연구를 즐긴다. 그러면서도 스스로는 연기할 때는 ‘괜찮지 않나’ 싶었는데, 하나의 캐릭터만 보여줬을 뿐 화면을 보니 죽어 있더라고. 하나의 캐릭터만 보여줬을 뿐 사내의 삶을 도려내지는 못한 작품이라 볼 때마다 아쉬워 할 정도로 자신에 대해 엄격하다. 그는 자신의 연기 연구에 대해 자신 있게 말한다.

“내 속엔 양아치도 있고, 여성도 있고, 고상한 면도 있어. 일단 내성에서 출발하려고 해. 물론 그것이 뿜어져 나오려면 연습이 필요하겠지만. 먼저 하나의 행동이나 연기가 어떤 정해진 감정을 불러올 것이라는 기대는 허물고. 그렇지 않으면 전형적인 연기가 불가능하지. 일반화된 연기만이 남을 뿐이야. 전형적이라는 것은 일반적으로 코믹할 것 같은 행동이 전혀 다른 무서운 느낌을 줄 수도 있는 그런 힘이지. 그런 과정이 전혀 어색하지 않으려면 또 연구할 수밖에.”

그러면서 그는 따뜻한 인생 그리고 눈빛만으로 하는 연기가 통하는 멜로드라마의 주역을 꿈꾼다.

이처럼 무대와 영화, 그리고 TV를 별로 가리지 않는 듯하지만, 안석환은 다른 인터뷰에서 영화나 TV는 그냥 몸을 빌려주는 것 같은데 연극은 내가 내 몸뚱이를 가지고 뭔가를 만들어내는 쾌감을 느낀다고 속내를 털어놓는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연극배우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이는 연극에서는 똑같은 작품의 캐릭터라 해도 전혀 말도 안 되는 코미디를 구사할 수 있는가 하면, 거꾸로 뒤집어엎는 반(反)연기도 할 수 있고, 또 시치미 떼고 연기하지 않는 것처럼 무(無)연기를 할 수도 있는 등 관객을 사로잡을 수 있는 방법이 많다고 보는 관점과 상통한다. 그러면서 사실주의적인 연기가 그 안에 있고 나서야 모든 표현이 가능해진다고 확언한다.

시간적인 여유가 생기면 시민단체에서 환경운동도 하고 싶다고 한 대로 그는 <우리겨레 하나되기 운동본부>의 홍보대사를 맡기도 할 만큼 반전평화에 대한 관심도 깊다.

그는 스스로의 표현대로 하자면 상복이 많은 편이다. 그러나 스스로 연극배우이기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기에는 무대 출연은 비교적 과작인 편이다. 자신이 맡았던 수많은 배역 중에서 <고도를 기다리며>의 에스트라공과 <남자 충동>의 장정에 이어 배우 인생에서 세 번째 캐릭터로 꼽은 <리처드 3세>는 근 10년 만에 선 무대였고, <웃음의 대학>도 2년 만이다. 과작이라고 해서 반드시 나무랄 것은 아니지만, 관객들은 무대에서 그를 좀 더 자주 만났으면 하고 기대한다는 것 역시 숨김없는 사실이다.

글_ 김문환 연극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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