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야, 청산가자!
글·사진_ 고영 시인아이야, 봄은 남국에서 오고 가을은 북국에서 온단다. 얼음나라 북국 철새들의 날개를 타고 온단다. 저 새들의 꽁무니를 쫓아 산 넘고 물 건너 땅 끝까지 가면 거기 아름다운 사람들이 사는 나라가 있단다. 아이야, 그 아름다운 나라 청산으로 가자!
따뜻한 남도 땅끝마을에도 어느덧 가을이 완연하다. 들판마다 쉬쉬쉬, 눈썹 휘날리는 억새꽃들이 발길을 붙잡는다. 억새 부딪치는 소리에 귀를 기울여보면 서편제에서 흘러나오는 한 구절 아련한 창소리 같다. 끊어질 듯 이어진다. 이곳 사람들의 질긴 생명력을 닮았다. 이 마을은 어느 길, 어느 골목, 어느 집이나 서편제 한가락이 흘러가는 듯 낮고 고요하다. 투박한 사투리에 얹힌 노랫가락은 여행길에 덤으로 얻을 수 있는 선물이다. 길 떠남은 그래서 좋다. 기대하지 않았던 행복을 얻을 수 있어 좋다. 바다로 향하는 작은 냇가를 사이에 두고 억새와 갈대가 나란히 머리를 흔들고 있다. 갈대의 서걱거림은 억새보다 요란하고 부산스럽다. 땅끝의 갈대는 유난히 키가 크고 억세다.
땅끝은 멀다. 먼 길을 왔음인가. 들판에 피어오르는 연기의 냄새가 맛났다. 풀 타는 냄새가 이상하게 식욕을 부추긴다. 왜 이 고장에만 오면 유독 허기가 지는가. 길가 좌판에서 파는 무화과 열매로 허기를 달랜다. 천상의 열매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그 맛이 과연 일품이다. 그러고 보니 무화과는 오래전부터 해남 인근에서만 나는 특산물이었다. 그만큼 해남의 날씨는 따뜻하다. 길 위에서 식욕을 느낀다는 건 바로 내가 살아 있음이다. 순박한 사람들의 가을걷이가 한창이다. 마음도, 손길도 바쁘다. 이 길도 덩달아 바빠질 것이다. 길은 늘 그렇게 사람들과 함께 보폭을 맞추며 걷는다. 담배를 입에 문 촌로의 까맣게 탄 얼굴에 여유마저 느껴진다. 가을이라는 계절 탓이다. 촌로의 이마에 패인 주름이 수확 끝낸 밭고랑처럼 깊다.
월출산 능선을 따라 흘러온 기암괴석들이 두륜산, 달마산을 거쳐 바다로 향한다. 더 뻗어나갈 길이 없어 용솟음을 쳤는가. 수도 없이 많은 섬들이 다도해에 올망졸망 솟아올랐다. 남도의 금강이라 불리는 달마산이 품에 안고 있는 고찰 미황사는 참 아름답게, 곱게 늙은 절이다. 절 입구에서 올려다보는 달마산 기암들의 자태는 이곳 해남에서 꼭 들러 보아야 할 절경 중에 하나다. 미황사는 규모는 그다지 크지 않으나 통일신라 말에 창건한 유서 깊은 절이다. 시간이 된다면 도솔봉에 있는 도솔암까지 오르는 것도 좋은 산행이 될 것이다. 그러면 아마 틀림없이 도솔천을 볼 수 있으리라. 달마산 북쪽 두륜산에 위치한 대흥사로 발걸음을 옮긴다. 절 입구에서부터 동백나무, 느티나무, 삼나무, 편백나무가 우거져 있다. 대낮에도 어두울 정도로 숲이 울창하다. 특히 이곳 대흥사 입구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왕벚나무 군락지가 있다.
대흥사 초입에 눈길을 잡아끄는 고택이 있다. 유선여관. 여관이라고 이름이 붙어 있지만 오래된 고택이다. 그런데 잘 꾸며진 정원이 어딘가 낯설다. 전통한옥에서는 볼 수 없는 구조가 흥미를 더한다.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집으로 한옥과 일본의 정원이 절묘하게 조화되어 이채롭다. 마루며 쪽창, 심지어 대들보까지도 손때가 묻어 윤기가 난다. 정성껏 가꾼 흔적이다. 대청마루에 앉아 여주인과 잠시 시간을 거슬러 이야기를 나눈다. 시간의 발자취를 묵묵히 지켜온 사람. 그녀에게서 오래된 가구의 미소가 보인다. 대흥사에 들어서자 거대한 느티나무 두 그루가 우뚝 서서 내방객을 맞는다. 연리근이다, 두 나무의 뿌리가 서로 붙어 하나가 된 나무다. 얼마나 그립고 사무쳤으면 뿌리에서부터 저렇듯 한 몸이 되었을까. 그리움이 크면 시공간을 뛰어넘는 게 사랑이다. 대웅전 추녀에 걸린 풍경의 물고기가 몸서리를 친다. 어쩌란 말이냐. 그리움이 그리움을 낳고, 마음이 마음을 낳는다. 두륜산 꼭대기에 뜬 낮달이 고개를 꺾는다. 홀로 길을 지키는 이름 없는 장승을 뒤로 하고 청산을 향해 길을 재촉한다.
청산도는 멀다. 땅끝마을에서 바라보면 바로 저 앞, 손을 뻗으면 잡힐 것 같은 거리지만 배를 타고 50분 정도 바다를 건너야 한다. 청산도. 영화 <서편제>의 촬영지로 세인에게 널리 알려진 섬이다. 기후가 따뜻해 이모작이 가능한 이 섬엔 5월이면 청보리가 넘실거리고 가을엔 메밀꽃이 지천이다. 그 보리밭 풍경을 배경으로 남도의 가락이 돌담을 따라 흐른다. 영화 <서편제>에서 보았던 그 아름답던 풍경들은 영화세트장처럼 변해 을씨년스럽기만 하다. 배가 들어올 때만 운행하는 마을버스가 승객을 실어 나른다. 버스에 탄 승객들은 대부분 도회지 사람들뿐, 섬사람들은 경운기나 오토바이를 이용하거나 그냥 걸어 다닌다. 결코 작지 않은 섬인데도 길은 단순하다. 해안과 섬 내륙을 잇는 도로가 전부다. 그나마 다니는 차들도 거의 없다.
걸어서 섬을 둘러보기로 한다. 느려서 좋을 때가 있다. 지금이 그 기분을 만끽할 때다. 사람이 느리면 길도 느리다. 길이 느리면 마음도 느리다. 느림. 느림의 길을 발견한다. 느림 속에 도솔천이 있고 청산이 있다. 느려야만 당도할 수 있는 길이 있다. 그래서인가. 이 섬엔 아직 초분이 남아 있다. 바람이 영혼을 데려가는 곳. 그래서 죽어서 더 자유로운 곳. 초분은 그 어느 봉분보다 엄숙하고 경이롭다. 청산은 말이 없이 그저 지켜볼 뿐이다. 느려터진다는 건 얼마나 아름다운 습관인가. 더 이상 갈 곳도 없이 절박할 때, 주저앉고 싶을 때, 막막할 때 느림은 힘이 된다. 언젠가 나는 섬 절벽에 서서 이렇게 읊조린 적이 있다.
‘절벽 위에 서면 누구나 한번 뒤돌아본다 / 그런 자는 반드시 살아 돌아간다’
해남 땅끝마을 가는 길은
서해안고속도로 목포 IC에서 해남까지
내비게이션 없이도 비교적
어렵지 않게 갈 수 있다.
문제는 주변 여행 코스를 어떻게 정하느냐다.
시간이 여유가 있다면 영암에 들러
F1(포뮬러 원) 경기장을 둘러보는 것도 좋다.
두륜산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올라 다도해의 절경을
내려다보는 것도 좋겠다.
단, 청산도행 여객선을 타려면
완도 여객터미널(061-552-0116)로 가야 한다.
청산도에선 반드시 손바닥만 한
자연산 홍합의 맛을 즐기기를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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