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학원, 윤의중 지휘자
글_ 하재영 소설가강서구 우장산동에 위치한 코러스센터는 부자(父子) 지휘자인 윤학원, 윤의중 교수가 1999년에 창립, 운영하고 있다. 윤학원 교수가 설립, 운영하는 한국지휘자 아카데미와 윤학원 코랄, 그리고 윤학원 교수가 설립하여 현재 윤의중 교수가 운영, 지휘하는 서울 레이디스 합창단 등이 이 건물에 있으니, 코러스센터는 두 지휘자가 함께 일궈낸 지휘 인생의 열매라 할 만하다. 코러스센터 지하 연습실에서 진행된 인터뷰는 아버지와 아들이 말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시종일관 편안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이루어졌다.
음악적 자양분이 된 가정, 지휘의 길라잡이가 된 아버지
윤학원 교수의 삶은 우리나라 합창음악의 발전사와 궤를 같이한다. 선명회 어린이 합창단을 34년간 지휘하며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렸을 뿐 아니라, 1989년에는 선명회 합창단 졸업생들로 구성된 서울 레이디스 싱어즈를 창단했다. 서울 레이디스 싱어즈는 애틀란타, 밴쿠버 등 해외 공연에서 더 큰 호평을 받으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아들인 윤의중 교수는 지휘자인 아버지와 성악가인 어머니 아래에서 자연스럽게 음악에 대한 소양을 키웠다.
“어렸을 때부터 아버지가 지휘하는 모습을 흉내 내며 놀곤 했어요. 음악적인 환경에서 자라다 보니 어느 순간 음악을 전공하겠다고 결심한 게 아니라 당연히 음악가가 되는 걸로 생각했지요.”
집안 분위기는 그대로 윤의중 교수의 음악적 자양분이 되었다. 예원, 예고를 거쳐 서울대 음악대학에 진학했으니 음악가로서는 엘리트 코스를 밟은 셈이다. 대학 때까지 바이올린을 전공한 그가 지휘에 관심을 가진 것은 훨씬 오래 전 일이다. 중학교 때 처음 지휘봉을 잡아 고등학교 때는 합창경연대회에서 입상했고, 서울대에서도 동아리 합창단 활동을 하며 지휘봉을 놓지 않았다. 지휘자의 길을 가기로 결심하고 본격적으로 지휘 공부를 한 것은 미국 유학 시절의 일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윤학원 교수가 아들이 지휘자가 되기를 바란 것은 아니다.
“아들이 처음 지휘하겠다고 했을 때는 걱정이 앞섰지요. 지휘자의 길이 어떤지 제가 잘 아니까요. 그래도 굳이 해야겠다면 바이올린을 전공했으니까 오케스트라 지휘를 하기 바랐어요. 그런데 제 영향인지 어떤지 결국 합창에 매력을 느껴서 합창 지휘를 하더라고요.”
윤학원 교수의 말에 윤의중 교수가 덧붙인다.
“저도 아들이 음악 하겠다는데 걱정부터 되더라고요. 상위 몇 퍼센트, 퍼스트클래스가 되지 않으면 예술가의 삶이라는 게 괴롭잖아요. 아버지도 그런 마음이셨겠죠.”
윤의중 교수에게 아버지는 누구보다 든든한 조언자다. 공연이 끝난 뒤 잘했다고 칭찬해 주는 사람들은 많아도 결점에 대해 지적해 주는 사람은 드물다. 아들의 지휘에 관해 윤학원 교수의 충고는 직설적이고 구체적이다. 윤학원 교수는 웃으며 “그래야 확실하게 고쳐지니까”라고 덧붙인다. 말만 조언이 아니다. 한때 윤의중 교수는 윤학원 교수의 지휘를 보며 아버지처럼 지휘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고민도 많았다. 그 과정을 거쳐 지금에 이른 윤의중 교수는 “시간이 해결해 주더라”고 말한다.
“지휘자가 하루아침에 되는 게 아니잖아요. 지휘 공부를 했어도 실전 경험에서 얻을 수 있는 건 따로 있죠. 아버지의 자연스럽고 노련한 지휘도 오랜 경험이 쌓여서 나온 것이고. 지금도 지휘를 하다 벽에 부딪혔다는 느낌이 들 때 아버지를 보면서 길을 찾으려고 노력합니다.”
윤의중 교수에게 윤학원 교수는 든든한 조언자이자 길잡이인 동시에 넘을 수 없는 벽이기도 했다. ‘지휘자 윤의중’으로 불리기보다 ‘윤학원 지휘자의 아들’이란 말이 수식어처럼 따라다녔던 지난날에 관해 묻자, 윤의중 교수는 “지금도 그렇다”고 말한다.
“미국에서 돌아와 한국에서 지휘자로 자리를 잡아가던 시절이 제일 힘들었어요. 한국에서는 제가 누구 아들인지 다 아니까 아무도 모르는 미국에 가서 활동할 결심을 했었지요.”
윤학원 교수가 창단한 서울 레이디스 싱어즈를 윤의중 교수가 맡은 건 2000년도의 일. 그때는 ‘아버지가 하던 일 물려받아 거저먹는다’는 식의 편견에 찬 비난이 가장 견디기 힘들었다. 그러나 아마추어 합창단인 서울 레이디스 싱어즈를 운영하는 과정에서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윤학원 지휘자의 아들’이라는 것을 비로소 받아들이게 되었다고.
“아버지는 합창 지휘계의 대부라는 이름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아버지의 아들인 것 또한 사실입니다. 그것이 제게 짐이 된다면 그 짐을 평생 짊어지고 가야겠다, 그렇게 생각하며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그때부터는 제가 먼저 스스로를 ‘윤학원 선생님 아들입니다’하고 소개할 수 있을 만큼 편해졌지요.”
어찌 보면 윤의중 교수의 말은 체념처럼 들리기도 할 것이다. 그러나 바꿀 수도, 부정할 수도 없는 사실을 인정하겠다는 결심을 나약한 포기와 동일시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것은 값진 체념, 성숙한 체념이다. 모 시립합창단 상임지휘자를 뽑을 때 윤의중 교수는 두 명의 최종후보 중 한 사람이었다. 그때도 윤학원 지휘자 아들이니 윤의중 교수가 상임지휘자로 임명될 거라는 추측이 기정사실처럼 떠돌았고, 그런 소문이 결과에 악영향을 끼쳤다. 그런 아들을 지켜보는 윤학원 교수의 마음 또한 괴롭지 않았을 리 없다.
“나 때문인가 싶어 미안하기도 하고 마음 아프기도 했지요. 윤의중 교수가 그 다음에 자양교회 성가대를 지휘했는데, 당시로서는 성가대 규모나 실력이 빈약했어요. 그런데 윤의중 교수가 성가대를 맡으면서 실력이 많이 늘었어요. 천여 명의 지휘자가 모이는 세미나가 있는데 거기서 윤의중 교수가 멋지게 터뜨렸지요. 조그만 성가대를 가지고 저렇게 잘할 수 있구나, 감탄하는 사람들이 많았어요. 그때부터 편견이 좀 덜해졌어요.”
그런 시기를 지나오며 윤의중 교수는 사람들의 편견에 찬 시선이 오히려 득이 되었다고 말한다. 윤학원 교수 역시 서울 레이디스 싱어즈를 맡은 뒤 윤의중 교수가 일취월장하는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며 함께 짊어지고 있던 마음의 짐을 던 것 같다고 말한다. 윤의중 교수가 맡고 있는 서울 레이디스 싱어즈는 현재 아마추어 합창단에서 프로 합창단으로 변모하기 위한 과도기를 거치고 있다. 윤의중 교수 역시 재정적인 부분부터 다양한 레퍼토리의 개발, 새로운 연주 방식 등을 구상하며 대중에게 인지도를 높이기 위한 방도를 구상하고 있다.
윤학원 교수 역시 여전히 왕성히 활동하는 ‘현역’이다. 한국지휘자 아카데미를 운영하며 후배 양성에 힘쓰고 있으며, 그의 이름을 딴 윤학원 코랄 또한 그의 열정을 증명하듯 화려한 경력을 자랑한다. 윤학원 교수가 25년간 재직해온 중앙대학교 음악대학을 명예 은퇴하며 이제까지 걸어온 길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창단한 윤학원 코랄의 합창단원은 다름 아닌 한국지휘자 아카데미 학생들이다. 윤학원 코랄 창단과 함께 지휘자를 지망하는 아카데미 학생들이 직접 합창단원이 되어 지휘를 배우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매년 국내외 초청연주와 교회순회연주를 하며, 엔니오 모리꼬네, 안드레아 보첼리와 협연하기도 했다.
이토록 열정적인 아버지와 아들은 2008년 ‘부자 배틀’이라는 이색 공연을 가지기도 했다. 윤학원 교수의 인천시립합창단과 윤의중 교수의 창원시립합창단이 ‘배틀’로 맞짱을 뜬 것이다. ‘배틀’이라는 표현이 부담스럽지 않았느냐는 질문에 두 사람은 아주 즐거웠다며 웃음 짓는다. “저야 아버지랑 하면 밑져야 본전이니까”라며 윤의중 교수가 농담을 던지자 “그럼, 내가 더 부담스러웠지”라며 윤학원 교수가 말을 받는다. 그 모습은 합창 지휘계의 대부로 불리는 아버지 밑에서 오랜 시간 누구의 아들로 호명되었을 윤의중 교수와, 그런 과정을 견디고 오롯이 자신의 이름 석 자로 우뚝 선 아들을 지켜보며 여러 감정이 교차했을 윤학원 교수이기에 가능한 듯했다. 두 사람은 사이좋은 부자이기 이전에 그 모든 것을 함께 이겨낸 사람들 특유의 친밀함과 여유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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