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 청춘,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①] 사는 거? 별 거 있어! 무조건 들이대는 거지

[문 | 청춘,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①] 사는 거? 별 거 있어! 무조건 들이대는 거지

입력 2011-05-01 00:00
수정 2011-05-0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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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어느 길로 가야 하는지 알려 줄래?”

“그건 어딜 가고 싶은지에 따라 달라지는데.”

고양이가 말했다.

“어딜 가고 싶은지는 아직 생각해 보지 않았는데…”

앨리스가 말했다.

“그럼 어느 길로 가든 상관없네, 뭐.”

-루이스 캐롤,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중에서-

넌 들어서 좋을 것도 없는 얘기를 왜 자꾸 해달래? 아, 알았어. 해줄 테니까 보채지 말고 술이나 한 잔 따라봐. (난 술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신다.) 여행의 목적 같은 건 애초부터 없었어. 서른의 첫 날을 해외에서 보내고 싶은 그런 막연한 로망만 있었지, 딱히 어디를 가고 싶다는 생각도 없었고. 그러다 영화 <사랑해, 파리>가 떠올라 잠깐 유럽여행을 꿈꿨는데 그것도 바로 접었어. 왜냐고? 돈이 없어서지, 뭐 다른 이유가 있어? 통장 다 모아놓고 잔고 확인해 보니까 갔다 오면 당분간은 쫄쫄 굶고 살겠더라. 그렇다고 여기저기 신세 지고 살 수도 없고. 그래서 유럽여행 포기하고 어디를 갈까 고민하는데, 열에 아홉이 인도를 추천하더라고. 그래서 간 거야. 별 다른 이유는 없었어, 싸니까. 곧장 여행사 다니는 친구한테 전화해서 비행기표를 예약하고, 인도만 가기엔 좀 아쉬워 두 달 일정에 태국을 넣었어. 그것도 앞뒤 스톱오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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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사는 그 즈음에 그만 뒀어. 왜, 전에 다니던 광고회사 있잖아. 이유? 물론 여행 때문만은 아니지. 내 것이 아닌 남의 것, 그것도 컴퓨터 앞에만 앉아 돈 주는 사람 입맛에 맞게 무난한 광고만 기획하던 일에 싫증도 났고 뭐랄까, 가치관의 변화 같은 것도 있었어. 그동안 가깝게 혹은 친하지는 않더라도 직업적으로 서로 연관된 사람들의 죽음을 접하게 됐는데, 삶이란 게 참 허무하구나 싶더라. 그래서 더더욱 내일보다 오늘이, 무엇보다 지금이 중요하다고 믿게 된 것 같아. 아, 오해하지는 마. 현재를 즐기며 그 순간에 열중하겠다는 것이지, 허무주의에 빠져 인생을 탕진하거나 내일에 대한 고민 없이 허송세월을 보내겠다는 뜻은 절대 아니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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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에 있어서의 성공, 그 의미는 잘 모르겠지만 난 적어도 대부분의 직장인들처럼 나이 쉰에 사회에서 내쫓기듯 물러나 노후 걱정하며 살고 싶진 않아. 게다가 내가 하는 일이 연예인의 인기 같은 것이어서, 딱히 정년이 정해져 있지도 않고. 인기 없어지고, 감 떨어졌다는 소문이 퍼지면 그날이 바로 정년이거든. 우리 사회에서 감독의 센스를 판단하는 기준이 작품이 아닌 나이에 있다는 것, 안타깝지만 명백한 사실이야. 그래서 대부분의 감독들이 40을 넘기지 못하고 은퇴 아닌 은퇴를 하는 거고. 이런 불안 요소들이 피부에 와 닿자, 더 이상 머뭇거리고 있을 수만은 없더라.

그래서 다시 회사를 차렸어. 뜻 맞는 다른 분야의 전문가들이 한데 모인 미디어회사. 회사 식구들을 모아놓고 대표로서 내가 꿈꾸는 회사, 나의 비전에 대해 얘기하고 내 여행에 대해 허락을 구했어. 내가 꿈꾸는 회사? 끊임없이 일만 하면서 덩치만 키우는 회사가 아닌, 따로 또는 같이 즐기며 일하고 그로 인해 얻은 수익을 우리에게 재투자해 구성원들 간의 내실을 단단하게 다지는 거야. 그렇게 되면 적어도 계속되는 시행착오 때문에 낙오하거나 먹고 살 걱정 때문에 꿈을 저버리는 일은 없겠지. 회사가 쫄딱 망하지 않는다면 말야. 얼마 전, 내가 여행 다녀온 뒤로 오랜 만에 회사 식구들이 한자리에 모였는데, 그들 말대로 나 없는 사이에 정말 많은 일들이 있었더라. 뉴욕에서 제작하는 영화의 한국 촬영 분량을 우리 회사에서 진행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 영화 반 이상을 우리 회사 에이전트 팀에서 진행하고 있더라고. 나 없이도 잘 돌아가네, 하며 장난스레 투덜댔는데 기분은 참 좋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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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만 하기엔 두 달이란 시간이 내겐 좀 길었어. 공부하는 마음으로 여행하라던 엄마 말씀을 새겨듣긴 했지만, 난 왠지 다 내려놓고 싶었거든. 그저 생각하는 데 집중했어. 불현듯 떠오르는 기억이나 생각을 따라 끝까지 가보는 거야.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상관없이. 가이드북을 찾아보며 어디를 갈지, 무엇을 보고 먹고 해볼지 고민하지 않고 그저 동네 마실 가듯 여기저기 돌아다니면서 말야. 걸어도 보고 버스나 택시, 때론 덜컹거리는 트램이나 보트를 타고 정처 없이, 내 마음대로…. 뭔가를 생각하고, 정리하고 또 누군가를 그리워할 수 있다는 것, 그게 이번 여행하면서 가장 좋았던 점 같아. 그런데 그러면서도 종종 새로운 자극을 찾고 이야기를 만들고 있는 날 발견하게 되더라. 틈틈이 찍은 사진이랑 메모가 어느 새 책 한 권이더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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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내가 얘기했었나? 태국에 있는 기획사와 미팅하고 왔다고. 인도 가기 전 방콕에 일주일 정도 머물렀는데, 태국에 불고 있는 한류가 엄청나더라. 음악이나 뮤직비디오 스타일도 우리나라와 비슷하고. 처음엔 그런가 보다, 하고 그냥 넘겼는데 인도 여행을 하면서 자꾸 생각이 나더라고. 그래서 조감독한테 부탁해서 내 포트폴리오 모아 태국 기획사들에 연락하고, 메일을 보냈지. 그리고 귀국하기 전날, 태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회사와 미팅을 할 수 있게 됐어. 놀라워? 하긴, 돌아와서 이런 얘기했더니 사람들이 다들 의아해하더라. 여행하면서 어떻게 미팅할 생각을 했는지, 그것도 한국 회사가 아닌 외국 회사에. 그 용기가 대체 어디서 난 건지 궁금해 하더라고. 그래, 용기. 다르게 보면 그게 용기일 수 있겠다. 그런데 그건 이제껏 내가 해왔던 방식일 뿐이야. 샐러리맨들의 영업방식 같은 거. 빽도 인맥도 하나 없는 신인감독이 자기를 알릴 수 있는 방법, 뭐가 있을 것 같아? 내 경우엔 무조건 들이대는 것 밖에 없었어. 생각해 봐! 집에만 처박혀 지내는 사람을 어느 누가 발견할 수 있겠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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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대학 졸업하고 서울 올라온 지 이제 5년이 다 된다. 처음엔 뭘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거의 석 달을 집에만 있었어. 아는 사람도 없으니, 나가봐야 혼자 바람 쐬고 돌아오는 정도밖에 안 됐거든. 집에서 하는 일이라고는 영화 보고, 그동안 썼던 시나리오 정리하는 게 고작, 가끔 커뮤니티사이트에 올라온 스태프 모집에 지원하기도 했어. 그 언제쯤인가? 같이 살던 누나가 엄마와 통화하며 싸우더라. 누나는 자기 나름대로 공부하고 준비하고 있으니 좀 더 지켜봐 달라고. 일종의 자신에 대한 변호를 하는데, 떨어져 사는 부모님이 그 사정을 알 리가 없지. 다 그만두고 공무원 시험이라도 보라고 하시더라고. 그 말에 얼마나 눈물이 났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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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눈물을 하늘이 안타깝게 여겼는지, 그 다음날부터 여기저기에서 연락이 오더라. 제일기획 영상자료실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영화 조명팀, 뮤직비디오 조감독, 시나리오 작가, 광고회사 PD 등을 했어. 그것도 짧은 기간에, 여러 영역을 오가면서 말야. 물론 열심히 했지. 그런데 운도 많이 따랐던 것 같아. 그렇지 않았다면 한 번에 두세 작품씩 꾸준히 하면서 여기까지 달려오지도 못했을 거야. 그리고 그동안 작품을 하면서 만났던 사람들과의 인연을 잘 이끌어온 것도 정말 큰힘이 됐어. 사회생활하면서, 특히 이쪽 일을 하면서 갖게 된 가장 큰 교훈은 ‘사람이 재산’이라는 거야. 혹자는 돈이 사람을 부른다고 하는데, 난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사람이 사람을 모으고 그에 따라 돈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거지, 선후(先後)가 바뀌면 글쎄, 그게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

이게 정말 내가 하고 싶은 일인가, 하고 스스로에게 되물을 때가 있어. 그때마다 그 대답은 말, 즉 언어가 아닌 전율로 다가오더라. 어떤 영화를 보거나 음악을 들을 때, 혹 기발한 아이디어가 떠올랐을 때 닭살 돋는 그런…. 닭살은 거짓말을 하지 않는 법이거든. 언젠가 내가 100% 행복해질 수만 있다면 영화 따위 미련 없이 포기하겠다고 말한 적 있지? 글쎄, 그 날이 언제가 될지 모르겠지만. 하나 확실한 건 그 전까지는 후회 없이, 재미있게 일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거야. 아니, 신나게 놀 수 있을 것 같아. 느껴져? 뭔가에 내가 잔뜩 들떠 있는 거? (난 그제야 지친 얼굴로, 꾸벅꾸벅 졸고 있는 친구를 본다.) 그래, 매일같이 야근하느라 피곤도 하겠지. 남의 돈 빌어먹는 게 쉬운 일은 아니잖아. 그렇다고 얘기해 달래서 기껏 해줬더니, 자냐? 가자, 일어나! 너 임마, 내일 출근해야지!

글·사진_ 민병채 시나리오 작가,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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