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7년 만에 콩트집 다시 묶은 시인 김남조
편운(片雲) 선생은 김남조 시인을 일러 “시는 뜨거운데 사람은 차갑다” 했다. 이 말의 깊이를 보랏빛으로 잴 수는 없을까. 이 말의 무게를 강물의 조약돌처럼 꺼내서 문질러 볼 수는 없을까. 아침의 붉은 해는 효창동 쪽으로 가면서 금세 번져서 흥미로운 하루를 일으켰다.훈훈한 김을 쏟아내는 찻잔이 멀뚱거리다, 떨리는 이의 입술을 더 붉게 해준다는 것을 알았다. 이야기가 멈추고 침묵이 흘렀다. 시인의 침묵은 오랫동안 묵혀놓는 시와 같아서 허투루 버리면 안 되었다. 다시 주워서 생각해야 하는 금쪽같은 빛이었다.
다시 이야기가 흐르자 우리는 보름 전에도 만난 사이처럼 간결한 표정으로 얘기할 수 있었다. 그리고 시인은 어느 순간에 이르러서는 가만히 우리의 이야기를 엿듣는 사물들에게도 가벼운 눈길을 보냈다. 보이지 않아도 우리가 쏟아놓은 말은 지속적으로 남아서 후일에는 그 누군가가 오늘의 시간을 뒤적거릴 수 있다고 믿었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니 사방이 더 고요해지는 듯싶었다.
시인의 열일곱 번째 시집을 기다리던 독자들에게는 아마도 이번의 두툼한 콩트집이 낯설지 않을까. 하지만 이 따끈한 책이 시인이 낳은 유일한 콩트집이라는 점을 알게 된다면 그 의미는 크고 남다를 것이다. 이번 콩트집이야말로 시인이 ‘간결하게’ 써온 그동안의 시들이 꼬옥 움켜쥐고서 놓지 않았던 그 삶의 주제가 무엇이었는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단서가 되지 않을까. 시는 아무래도 시인의 삶에서 가장 가깝고 고통스런 삶을 배면으로 그 뾰족한 꽃망울을 터뜨리지 않았던가.
“이 책은 가려져 있는 아름다운 사람들을 주제로 쓴 이야기입니다. 젊은 시절의 나는 시와 수필을 정신없이 썼지요. 그리고 그것을 책으로 묶었지요. 그러고도 사람의 이야기에 목마름이 남아서 쓴 게 이번의 콩트지요.”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그 스스로는 여기기에 무심하기에, 꽃은 제 어여쁨을 모르고, 산은 그 장엄에 침묵하기에, 아름다운 사람들도 드러나지 않는 곳에서 고요하고 선하며, 절실한 가슴을 지니기에, 바로 그러한 사람들을 찾아서 콩트를 쓰게 된 것”이라고 시인은 말했다. 그래서 시인은 이번의 콩트집은 가려져 있는 이들을 찾아 나선 ‘여행의 보고서’라고 했다.
시인은 이처럼 ‘가려져 있는’ 사람을 그동안 열심히 찾았으며, 가려진 삶에도 바짝 귀를 기울이기 위해 자신을 더 낮추는 시간을 가졌다. 시인의 이런 모습은 새 콩트집의 한 본문에서도 찾아진다. 나쁜 일은 당한 아이가 평생 품어야 하는 상처가 되었다. 아이에게 그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된 할머니가 아이에게 ‘말’의 힘을 일러주는 훈훈한 장면이다.
소설적 문체를 가진 이 콩트는 분명히 그 누구의 ‘상처’를 위로하고 위무하는 모습으로 이어졌다. 나아가 이야기 속의 아이는 이야기 밖으로도 나와서 곧 그 자신의 ‘말’을 살찌우면서 지금보다 더 강하고 멋지게 자신을 삶을 꾸려갈 수 있을 것 같았다.
이 장면은 상처를 품고 사는 이들에게 ‘말’의 소중함을 일러주는 따뜻한 이야기이며, 시인이 갈고 다듬어 쓰는 시의 힘이 사실은 ‘살아 있다고’ 하는 존재의 귀 기울임으로부터 시작한다는 것을 자연스럽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말 그대로 “이 할미를 믿고 다 말해 보려무나”의 진실한 마음으로 시보다 아름답게 이 콩트들을 썼다.
나아가 그토록 아름다운 이가 머물고 있는 그곳은 “지구의 가장 구석진 방(<좋으신 손님> 중에서)” 이라도 우리는 그곳이 “지구의 귀한 중심이 되어” 당신의 위대한 삶이 그 방에서도 일어날 수 있음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희망을 얻기 위해서는 분명 구석진 방의 어두운 빛과 고통도 함께 껴입어야 하지 않을까요? 라고 물었다. 시인은 릴케의 이야기를 조용히 탁자 위로 꺼내 놓았다.
“릴케가 운명한 후였지요. 그의 침대 시트에는 먹지 않고 모아둔 진통제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고통의 맛까지도 음미하는, 그렇게 한 생애를 살아보고자 애쓰지 않았을까요.”
시인의 어조는 낮았지만 계속 이어졌다. “모든 불행 안에도 위안이 있고 황량한 파괴 안에도 미학이 있다는 걸 절감하지 않을 수가 없는 나날입니다.”
먼지 한 점 가라앉을 수 없을 것 같은 깨끗한 이력의 시인에게 ‘시인의 삶은 어떤 삶’이어야 할까?
“김기림의 시 가운데 기상도가 있습니다. 비유하자면 우리는 모두 각자 하나씩의 기상대입니다. 기상대는 천체에서 오는 파장과 빛을 원하든 원치 않든 간에 수신하고 송신해야 합니다. 그래야 하지 않을까요? 그래서 좋지 않은 상황이 와도 그것을 예민하게 받아 충실히 송신하는 것이 문학적 삶이자 그의 사명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글을 쓰는 것 아니겠습니까.”
내친김에 콸콸콸 쏟아지는 시의 방류 현상에 대해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문학은 항상 살아서 반응하는 세포가 있어야 해요. 육체의 디엔에이가 아니고 감성의 디엔에이, 나아가 영혼성의 지도를 읽는 그러한 기능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것을 두고 습관화된 언어에만 의존하는 건 의미 상실이라고 생각합니다.”
상실감이 점점 많아지는 세상에서 시인이 강조한 말들은 과연 언제까지 우리의 뇌리에 남아 있을까. 오늘의 시인이 말한 이야기들은 저녁의 기도처럼 삶과 꿈을 잃지 않은 이들에게 기쁨이 될 듯싶었다.
우리의 삶이 시인이 쓴 콩트의 한 페이지라면 “사람의 본질은 유구히 동일하며 선하고 아름다울 거라는 믿음” 때문에라도 더 행복해질 것이다.
오늘 밤에도 시인은 가려져 있는 이들을 위하여 그야말로 ‘특별한 라이터’를 켜듯이 환하고 환한 기도를 올릴 것이다.
글_ 이기인 기획위원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