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펜팔 소동

사이비 펜팔 소동

입력 2010-12-26 00:00
수정 2010-12-26 12:30
  • 기사 읽어주기
    다시듣기
  • 글씨 크기 조절
  • 댓글
    0
이미지 확대
40년도 더 지난 일이다. 대학 신입생 시절, 우연히 성인용 주간지를 뒤적이다 장난기가 발동해 ‘펜팔 원함’ 지면에 내 이름 ‘이선기’의 마지막 글자를 ‘희’로 바꿔 엽서를 보냈다. 그 뒤 하숙집으로 엄청난 양의 편지가 날아들었는데, 그중에 매우 인상적인 편지 한 통을 발견했다.

정성이 가득 담긴 편지의 주인공은 상주가 고향이며 포천에 주둔하는 부대에 근무하는 27세 육군 상병이었다. 농촌에서 청년회장을 맡고 있다가 입대했다는 그의 편지엔 도시 처녀에 대한 동경과 고독에 몸부림치는 군인의 애절한 마음이 진솔하게 담겨 있었다. 그 사연에 감동한 나머지, 나는 심야 라디오 프로그램에서 들은 가슴 설레는 언어들을 주워 모아 사랑에 목마른 여성이 되어 답장을 보냈다. 그는 전혀 그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고, 날이 갈수록 편지 내용은 성숙한 청춘남녀의 뜨거운 열정으로 달아올랐다.

그리고 1년이 지난 어느 날, 수습 불가능한 일이 터지고 말았다. 그가 휴가를 받아 군복 차림으로 나를 찾아온 것이다. 혼비백산해 같은 방을 쓰는 학형에게 무서운 오빠 행세를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무라다 못해 시골 외갓집에 갔다고 설득해도 소용없었다. “마지막 휴가를 받아 집에도 안 가고 왔다”며 세상에 없는 ‘선희 씨’만을 찾았다고 한다. 40년이 지난 지금에야 그때의 잘못을 고백하며 그분에게 진심으로 용서를 빈다.

이선기(서울 마포구 공덕동)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
close button
많이 본 뉴스
1 / 3
광고삭제
광고삭제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