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에서 20년 간 북한의 군수담당 정보기관으로 활동했던 김종률(75) 씨는 11일 연합뉴스와의 전화 인터뷰에서 “하루 3.5유로(한화 약 5천400원)의 돈으로 생활하면서 5천619일 동안 같은 침대에 누웠다”고 말했다.
다음은 김 씨와의 일문일답.
-16년 간 잠적하다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사람이 70세가 되면 죽음을 생각하는 법이다. 그냥 이렇게 죽어야 하나 자문했다. 마지막 한 마디를 하고 싶었고, 그것을 책으로 냈다. 한국 사람들은 북한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잠적 당시 직책은.
▲북한 사람들이 외국이 나올 때는 다 가짜 명칭 달고 나온다. 난 조선기계수출입상사 직원으로 나왔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소속된 곳은 호위사령부 제1국(행사조직국) 경비운수부였다. 난 북한군 대좌로 기술담당 부부장이었다.
이에 앞서 1955년부터 1962년까지 드레스덴 공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해 기계설계기사가 된 뒤 귀국해 함흥의 룡성기계연합기업소에서 서기원으로 일했다.
34세였던 1969년 호위사령부의 소환으로 군복을 입게 됐다. 이후 1994년 오스트리아에서 근무하다 잠적할 때까지 25년 간 군에 있었던 셈이다.
조선기계수출입상사 부사장 등의 직함을 가지고 오스트리아 빈 등 유럽에서 3~6개월씩 활동하다 귀국하게 되면 다시 군복을 입고 호위사령부로 출근했었다.
-주로 어떤 물건을 사들였나.
▲금속탐지기, 독가스탐지기와 같은 신변보호용 기계설비와 장비가 매년 주로 산 물건들이다.
또 김일성 주석의 별장에 들어갈 물품들을 모두 다 사서 보냈다. 창문, 벽지, 타일까지 구입해 컨테이너에 넣은 다음 연장 2만5천㎞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해 북한으로 보냈다. 운송기간이 4~5개월 걸렸다.
빈을 중심으로 독일,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에서 물건을 구입했다. 수출이 제한된 물건들에 대해서는 중개상인들에게 20~30%의 웃돈을 주고 샀다.
북한 주민들은 굶어 죽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지만, 독재자들은 신변을 보호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북한이 5년 내 붕괴할 것으로 기대하고 탈출했다고 밝혔는데, 지금 상황은 어떻게 보나.
▲당장은 붕괴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사람들이 독재자를 미워하지만 0.1%도 되지 않는 주변의 무리가 주민들 탄압하고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게 잡아 1만 명도 되지 않는 그들이 독재 정권이 유지되기를 원하고 있다.
-북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북한 사람들은 북한 정치가 100% 옳다고 생각한다. TV, 라디오까지 보지 못하게 하니 단순한 북한 서민들은 하나도 모르고 있다. 하지만, 다 틀렸고 썩었다. 반민주적, 반국가적 노름을 하고 있다. 화폐 위조와 같은 범죄행위도 많이 하고 있다. 난 서방의 자유를 봐서 판단할 수 있다.
-그동안 어디에서 은신했나.
▲빈 인근에 있는 조그만 농촌마을의 지하 방에서 생활했다. 오스트리아 사람의 이름을 빌려 방을 얻었다. 난 1994년 10월 18일부터 5천619일 동안 같은 침대에 누웠다. 나에게는 달력도 필요 없었다. 하지만 매일 시간과 분초를 다투며 살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어떻게 해결했나.
▲유럽에서 유학하고, 20년 동안 활동하면서 아는 회사만 100~200개이다. 내가 아는 사업가들에게 ‘물품이 시베리아에서 도난당할 경우 내가 채워 넣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따라서 여기에 대비해 3%의 커미션은 내 몫으로 챙겨놓아 달라’고 얘기했다. 잠적하기 수개월 전 비밀리에 은행 계좌를 만들어 이 돈들을 모아 놓았다. 16년 동안 하루 평균 3.5유로의 돈으로 생활했다. 이것은 말보로 담배 1갑 가격 보다 적은 돈이다.
-잠적 당시 죽음으로 위장했다고 했다. 이후 북한이 추적에 나선 징후는 없었나.
▲모르겠다. 수염도 그리고 안경도 끼는 등 변장을 했었다. 한 번도 이름을 밝힌 적이 없다.
-북한에 남은 가족은.
▲한 번도 연락해보지 않아 생사도 모른다. 당시 처와 아들, 딸이 있었다. 아들은 이제 45세, 딸은 40세쯤 됐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에 망명을 신청했는데, 얼마나 걸리나.
▲아주 복잡해서 1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난 돈이 없다. 담당 관청에 갔더니 경찰이 질문하는데 신문을 하듯 한다.
-한국으로 망명할 생각은 없나.
▲2006년 주오스트리아 한국 대사관의 외교관들과 얘기를 했으나 잘 안됐다. 사실 한국 망명까지 생각했었다. 당시 대사관 관계자가 거절했으나, 한국 정부가 거절한 셈으로 생각한다. 내가 뿔이 달린 공산당이라 그런 것 같다.
-지금 심경은.
▲북한 공산당한테 붙잡힐까 봐 불안하다.
베를린=연합뉴스
다음은 김 씨와의 일문일답.
-16년 간 잠적하다 모습을 드러낸 이유는.
▲사람이 70세가 되면 죽음을 생각하는 법이다. 그냥 이렇게 죽어야 하나 자문했다. 마지막 한 마디를 하고 싶었고, 그것을 책으로 냈다. 한국 사람들은 북한의 실체가 무엇인지 잘 모른다.
-잠적 당시 직책은.
▲북한 사람들이 외국이 나올 때는 다 가짜 명칭 달고 나온다. 난 조선기계수출입상사 직원으로 나왔다. 하지만 실제로 내가 소속된 곳은 호위사령부 제1국(행사조직국) 경비운수부였다. 난 북한군 대좌로 기술담당 부부장이었다.
이에 앞서 1955년부터 1962년까지 드레스덴 공대에서 기계공학을 전공해 기계설계기사가 된 뒤 귀국해 함흥의 룡성기계연합기업소에서 서기원으로 일했다.
34세였던 1969년 호위사령부의 소환으로 군복을 입게 됐다. 이후 1994년 오스트리아에서 근무하다 잠적할 때까지 25년 간 군에 있었던 셈이다.
조선기계수출입상사 부사장 등의 직함을 가지고 오스트리아 빈 등 유럽에서 3~6개월씩 활동하다 귀국하게 되면 다시 군복을 입고 호위사령부로 출근했었다.
-주로 어떤 물건을 사들였나.
▲금속탐지기, 독가스탐지기와 같은 신변보호용 기계설비와 장비가 매년 주로 산 물건들이다.
또 김일성 주석의 별장에 들어갈 물품들을 모두 다 사서 보냈다. 창문, 벽지, 타일까지 구입해 컨테이너에 넣은 다음 연장 2만5천㎞의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이용해 북한으로 보냈다. 운송기간이 4~5개월 걸렸다.
빈을 중심으로 독일,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등 유럽 전역에서 물건을 구입했다. 수출이 제한된 물건들에 대해서는 중개상인들에게 20~30%의 웃돈을 주고 샀다.
북한 주민들은 굶어 죽고, 고단한 삶을 살고 있지만, 독재자들은 신변을 보호하는데 돈을 아끼지 않는다.
-북한이 5년 내 붕괴할 것으로 기대하고 탈출했다고 밝혔는데, 지금 상황은 어떻게 보나.
▲당장은 붕괴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다. 사람들이 독재자를 미워하지만 0.1%도 되지 않는 주변의 무리가 주민들 탄압하고 억압하고 있기 때문이다. 크게 잡아 1만 명도 되지 않는 그들이 독재 정권이 유지되기를 원하고 있다.
-북한에 대해 어떻게 평가하나.
▲북한 사람들은 북한 정치가 100% 옳다고 생각한다. TV, 라디오까지 보지 못하게 하니 단순한 북한 서민들은 하나도 모르고 있다. 하지만, 다 틀렸고 썩었다. 반민주적, 반국가적 노름을 하고 있다. 화폐 위조와 같은 범죄행위도 많이 하고 있다. 난 서방의 자유를 봐서 판단할 수 있다.
-그동안 어디에서 은신했나.
▲빈 인근에 있는 조그만 농촌마을의 지하 방에서 생활했다. 오스트리아 사람의 이름을 빌려 방을 얻었다. 난 1994년 10월 18일부터 5천619일 동안 같은 침대에 누웠다. 나에게는 달력도 필요 없었다. 하지만 매일 시간과 분초를 다투며 살았다.
-경제적인 어려움은 어떻게 해결했나.
▲유럽에서 유학하고, 20년 동안 활동하면서 아는 회사만 100~200개이다. 내가 아는 사업가들에게 ‘물품이 시베리아에서 도난당할 경우 내가 채워 넣지 않으면 벌을 받는다. 따라서 여기에 대비해 3%의 커미션은 내 몫으로 챙겨놓아 달라’고 얘기했다. 잠적하기 수개월 전 비밀리에 은행 계좌를 만들어 이 돈들을 모아 놓았다. 16년 동안 하루 평균 3.5유로의 돈으로 생활했다. 이것은 말보로 담배 1갑 가격 보다 적은 돈이다.
-잠적 당시 죽음으로 위장했다고 했다. 이후 북한이 추적에 나선 징후는 없었나.
▲모르겠다. 수염도 그리고 안경도 끼는 등 변장을 했었다. 한 번도 이름을 밝힌 적이 없다.
-북한에 남은 가족은.
▲한 번도 연락해보지 않아 생사도 모른다. 당시 처와 아들, 딸이 있었다. 아들은 이제 45세, 딸은 40세쯤 됐을 것이다.
-오스트리아에 망명을 신청했는데, 얼마나 걸리나.
▲아주 복잡해서 1년이 걸리는 경우도 있다고 한다. 난 돈이 없다. 담당 관청에 갔더니 경찰이 질문하는데 신문을 하듯 한다.
-한국으로 망명할 생각은 없나.
▲2006년 주오스트리아 한국 대사관의 외교관들과 얘기를 했으나 잘 안됐다. 사실 한국 망명까지 생각했었다. 당시 대사관 관계자가 거절했으나, 한국 정부가 거절한 셈으로 생각한다. 내가 뿔이 달린 공산당이라 그런 것 같다.
-지금 심경은.
▲북한 공산당한테 붙잡힐까 봐 불안하다.
베를린=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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