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향 질문으로 후보 알리기..’사전신고제’ 취지 무색
지방선거와 관련돼 쏟아지는 여론조사가 사실상의 편법 선거운동으로 변질되고 있다.사전 선거운동과 무분별한 여론조사를 막으려고 이번 지방선거부터 미리 조사대상과 질문 등을 신고하도록 하는 ‘여론조사 사전 신고제’가 도입됐지만 이를 막기에는 역부족이다.
지난 1월 25일 공직선거법이 개정되면서 선거일 180일 전부터 선거일의 투표 마감 시각까지 정당과 후보 등의 지지도 등에 관한 여론조사를 하려면 조사 개시일 2일 전까지 해당 선관위에 신고해야 한다.
따라서 정당과 언론매체 등을 제외하고는 입후보 예정자가 전문기관에 조사를 의뢰하거나 여론조사 기관이 자체 조사할 때는 선관위에 신고해야 한다.
이 법이 시행된 이후 24일까지 경남지역에서 신고된 지방선거 관련 여론조사는 143건에 이른다.
이 가운데 49.7%인 71건은 광역 및 기초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관련된 것이거나 입후보 예정자가 신고한 것이다. 다른 72건(50.3%)은 교육감과 광역ㆍ기초의원 선거와 관련된 것이다.
인천과 대구에서도 각각 60여건의 여론조사 사전신고가 접수되는 등 지역마다 이번 선거와 연관된 여론조사가 줄을 잇고 있다.
◇무늬만 여론조사 = 이처럼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여론조사의 상당수는 법의 테두리를 넘나들면서 특정 후보를 알리는 선거운동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경남도지사 선거의 경우 9건의 여론조사가 신고됐는데, 전체 7명의 예비 후보자 중 1명이 지난달 2차례, 이달 3차례 등 모두 5차례나 신고했다.
이 예비후보는 반복적인 여론조사를 통해 자신을 유권자에게 널리 알리겠다는 속셈인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상당수 설문조사는 질문 자체가 특정 후보에 유리하게 설계돼 있어 진정한 유권자의 여론을 살피기보다는 일방적으로 후보를 홍보하는 수단으로 악용되고 있다는 지적이 많다.
창원시 공무원 조모(52)씨는 “최근 모 여론조사기관에서 통합 창원시장 후보에 대해 전화설문에 응해달라는 요청을 받았는데, 설문 항목이 특정 후보에 유리하게 돼 있었다”고 했다.
이 설문에는 통합 창원시장의 유력한 2명의 후보 중 한 사람은 1번으로 제시하고 다른 사람은 마지막에 언급함으로써 특정 후보의 지지율을 높이려는 의도가 보였다고 조씨는 지적했다.
수원시 장안구 김모(44)씨는 “어떤 예비후보 측은 초반에 후보의 경력, 가치관 등을 장황하게 설명하고 나서 질문을 시작해 여론조사인지 선거운동 전화인지 헷갈릴 정도였다”고 말했다.
인천시 부평구에서는 ‘다음 후보들이 출마할 경우 누구에게 투표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지고 자신과 경쟁 상대자 2명의 이름만 제시하는 구청장 예비 후보자도 있었다.
모두 16건의 여론조사 신고가 접수된 울산에서는 동구지역 선거구 시의원에 도전한 한 예비후보자가 전화설문을 통해 “누군데 나를 아느냐”라는 황당한 질문을 하기도 했다.
광주지역 교육감과 교육위원 선거에 나설 뜻을 가진 일부 예비 후보자는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조사 항목을 만들어 전문기관에 의뢰하는 ‘맞춤형 여론조사’를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남도 선관위 관계자는 “상대 쪽에서 보면 사안에 따라 편파적일 수도 있지만 설문 대상 후보의 순서까지 일일이 간섭할 수 없다”며 “후보들의 설문 순서를 바꾼다면 오히려 공정성을 해칠 수 있다”고 어려움을 토로했다.
◇조사결과 공개 놓고 마찰 = 광주시에서는 시장 선거 민주당 경선을 앞두고 자신에게 유리한 여론조사를 언론에 공개한 것을 둘러싸고 후보 간 신경전을 벌어졌다.
정동채 후보는 최근 “이용섭 의원이 21일 ‘후보 적합도는 이용섭 선두, 후보 가능성은 강운태 앞서’라는 여론조사 결과를 자료로 배포한 것은 명백한 선거법 위반”이라며 “이 의원이 언론사에 배포한 여론조사 결과에 대한 입수 및 배포 경위를 명확하게 밝혀야 한다”고 요구했다.
이에 앞서 이용섭 의원 측은 “강운태 의원이 기자회견 때 출처 불명의 ‘민주당 광주 우대당원 및 대의원 여론조사 결과’를 제시하면서 민주당의 조사 결과인 것처럼 기자들에게 배포했다”며 “중앙당이 적절한 조처를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경남 거제시에서는 시장 선거의 한 예비후보 사무소 측이 23일 자체적으로 한 여론조사 결과 보도자료를 기자들에게 돌렸다가 선관위가 문제를 제기하자 뒤늦게 ‘기사화하지 말아 달라’며 기자에게 일일이 전화한 적도 있었다.
◇전화설문 공해..”귀찮아 죽겠다”= 여론조사가 지나치게 잦다 보니 시도때도없이 걸려오는 설문 전화 때문에 유권자들의 고통도 이만저만이 아니다.
수원시 장안구에 사는 주민 김모(44)씨는 “거의 매일 저녁마다 여론조사 전화가 걸려와 바로 끊는 경우가 많다”며 “30분 사이에 3통이나 받은 적도 있다”고 하소연했다.
경북 문경에 사는 김모(50)씨도 “선관위에 신고됐는지 안 됐는지 모르지만 지방선거와 관련된 전화가 자주 와서 아예 받자마자 끊어 버린다”고 말했다.
◇역할 못하는 ‘사전신고제’ = 여론조사 신고 항목은 조사의 목적, 표본의 크기, 조사 지역ㆍ일시ㆍ방법, 전체 설문내용 등이다.
조사 문항이 일방적이거나 편파적일 경우 행정지도를 통해 수정하도록 하고 있지만 강제력은 없다.
법 위반 행위 등 문제가 발견되면 조사해 사후에 처벌한다고 하지만 실제 전화로 여론조사를 하는 과정을 일일이 감시할 수 없는 만큼 유명무실하다는 지적이다.
아직 전국적으로 여론조사와 관련해 선관위의 조사나 처벌을 받은 사례는 없는 것으로 알려졌다.
예비후보자 대부분이 전문기관에 맡겨 조사하고 있는데 여기에 드는 비용이 만만치 않다.
그러나 선거비용이 아닌 정치자금으로 분류돼 금액 제한을 전혀 받지 않는 것도 문제로 지적된다.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여론조사를 빙자한 사전 선거운동의 길이 열려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경남도 선관위 관계자는 “아직 여론조사 신고와 관련해 법을 위반해 적발된 사례는 없다”면서 “신고한 내용과 다르게 조사하면 250만원 이하 과태료, 아예 신고하지 않으면 1천만원 이하의 과태료가 각각 부과된다”고 말했다.
대구참여연대 강금수 사무처장은 “여론조사를 통해 후보나 정당이 간접적으로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는 것이 눈에 보인다”며 “선관위가 이를 더욱 철저히 감시해야 한다”라고 지적했다.
전국종합=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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