뒤틀린 애정이 빚은 도심 인질극 재구성

뒤틀린 애정이 빚은 도심 인질극 재구성

입력 2010-07-26 00:00
수정 2010-07-26 0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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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중랑경찰서는 25일 서울 중화동 H아파트에서 인질극을 벌인 박모(25)씨에 대해 살인 및 특수감금 혐의로 구속영장을 신청했다. 이번 인질사건은 한 남성의 ‘뒤틀린 애정’이 빚은 참극이었다. 23일 오후 4시부터 24일 새벽 2시까지 10시간가량 서울 도심에서 빚어진 인질극을 재구성했다.

●7월 초 결혼 반대에 앙심 품어

인질극을 벌인 박씨는 지난해 7월 지인의 소개로 김모(26·여)씨를 만났다. 그러나 박씨는 김씨와 만나면서 종종 다퉜고 그때마다 물건을 부수거나 김씨를 집에 붙잡아 두는 등 흉폭한 모습을 보였다. 그는 일정한 직업이 없었고, 과거 상해 전과로 벌금을 내지 않아 수배를 받고 있었다. 김씨 가족은 박씨가 집에 찾아오는 것을 싫어해 지난 6월 면목동에서 중화동으로 이사했다. 김씨의 아버지는 지난 5월부터 “인상이 좋지 않고 포악하다.”는 이유로 헤어질 것을 강권했다. 이달 초 박씨는 중화동 김씨의 아파트에 찾아가 부모에게 “결혼을 허락해 달라.”고 빌었지만 쫓겨났다.

김씨 부모의 냉대에 앙심을 품은 박씨는 협박을 해서라도 김씨와의 만남을 이어 가기 위해 흉기를 준비하기로 마음먹었다. 지난 13일쯤 인터넷 쇼핑몰에서 길이 24㎝의 회칼과 수갑을 구매했고, 사건 발생 이틀 전인 21일 택배로 받았다. 그는 휴대용 가방에 흉기를 숨긴 다음 지난 23일 오후 4시쯤 김씨의 집을 다시 찾았다. 그는 문전박대당할 것에 대비해 벨을 누른 뒤 “등기우편이 왔다.”고 속였다.

●23일 오후4시 흉기 준비해 침입

문을 열어준 김씨의 어머니 송모(49)씨는 박씨를 보고 놀라 “왜 왔느냐. 당장 나가라.”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흥분한 박씨는 흉기로 송씨의 오른팔 팔꿈치 안쪽을 찔러 동맥과 뼈가 끊어지는 중상을 입혔다. 피를 많이 흘린 송씨는 5~10분 뒤 사망했다. 김씨의 아버지는 박씨 침입 사실을 모르고 직장에서 퇴근해 돌아오다가 문이 닫혀 들어가지 못하고 경찰과 함께 애타게 상황을 지켜봤다.

박씨는 송씨의 시신을 거실 소파에서 침실로 옮기고 김씨에게 피가 튄 자신의 옷을 벗고 새 옷을 달라고 해 갈아입었다. 또 김씨에게 밥을 지어 달라고 요구해 시신 옆에서 태연히 밥을 먹고 창밖을 내다보며 담배를 피웠다. 김씨에게는 반항하지 못하도록 수갑을 채웠다. 비명 소리를 듣고 오후 4시5분쯤 이웃집 주민이 신고해 10분 뒤 경찰관이 몰려왔지만 박씨는 현관문을 걸어 잠그고 버텼다. 박씨는 경찰과의 첫 통화에서 “어머니가 사망했다.”고 말했고, 경찰은 김씨의 신변보호를 목표로 설득을 시작했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살아 있는 김씨를 보호하기 위한 설득이 주효한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24일 오전2시 눈물겨운 설득에 자수

박씨는 서울지방경찰청이 동원한 프로파일러에게 휴대전화로 “여자 친구와 300일을 맞아 바다에 가고 싶다. 자동차를 준비해 달라.”는 요구를 했다. 그는 경찰과 70여차례 통화했지만 “강제로 들어오면 같이 죽겠다.”며 막무가내로 문을 열지 않았다.

하지만 김씨가 중상을 입은 어머니를 옆에 두고 경황이 없는 와중에도 눈물을 흘리며 과거 추억을 말하자 박씨의 마음이 다소 누그러졌다. 김씨는 술로 박씨의 마음을 진정시킨 뒤 “네가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것이다. 죽지 말고 자수해라.”고 거듭 타일렀다. 결국 사건 발생 10시간이 지난 24일 오전 2시 박씨는 “우리 손 잡고 함께 나가자.”며 경찰에 자수했다. 탈진한 김씨는 뒤따라 나왔다. “심정이 어떠냐.”는 취재진의 질문에 박씨는 “어떨 것 같느냐.”고 되받아쳐 주민들로부터 거센 비난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다음날 경찰조사에서 “여자 친구의 어머니를 해칠 생각은 없었다. 일이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며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

정현용기자 junghy77@seoul.co.kr
2010-07-26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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