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문화재 훼손 현장…고양 ‘행주대첩비’

일제 문화재 훼손 현장…고양 ‘행주대첩비’

입력 2010-08-12 00:00
수정 2010-08-12 09: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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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우리의 민족의식을 고취할만한 문화재를 없애려는 게 일본의 계획이었습니다”

 조선이 일본에 승리한 기념비 중 일본이 첫번째로 말살하려 했던 대상이 경기도 고양시 행주산성에 있는 행주대첩비 초건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74호)다.

 기자는 12일 정동일 고양시 문화재 전문위원과 함께 일제 만행의 현장,행주대첩비를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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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고양 행주산성에 있는 행주대첩비 초건비의 앞면 상단부 모습. 가장 위에 가로로 쓰인 큰 글씨는 비명, 그 아래 세로로 쓰여진 작은 글씨는 본문이다. 본문은 고르게 풍화된 보이지만 비명은 글자의 특정 부분이 훼손된 모습이다. 연합뉴스
경기도 고양 행주산성에 있는 행주대첩비 초건비의 앞면 상단부 모습. 가장 위에 가로로 쓰인 큰 글씨는 비명, 그 아래 세로로 쓰여진 작은 글씨는 본문이다. 본문은 고르게 풍화된 보이지만 비명은 글자의 특정 부분이 훼손된 모습이다.
연합뉴스


 덕양산 정상의 초건비(높이 188×너비 80×두께 19㎝)는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행주대첩을 이끈 권 율 장군의 공을 기리고자 그의 부하들이 1602년(선조 35년) 세운 것이다.

 최 립이 비문을 짓고 김상용이 비의 명칭을,한석봉이 비문을 쓴 것으로 전해진다.비 뒷면은 장군의 사위인 이항복이 비문을 짓고,김현성이 글씨를 썼다.

 비가 세워진 지 400여년이 흐른 지금,초건비 본문은 오랜 세월 비바람에 풍화된 듯 대부분 지워져 흐릿했다.

 하지만 비 앞면 머리 부분에 있는 비명(두전.頭篆)은 양상이 달랐다.풍화됐다고 보기에는 그 정도가 고르지 못했고,글자의 특정 부분을 통째로 훼손해 곳곳이 움푹 파여 있었다.

 파인 흔적이 두드러진 곳은 글씨 주변부가 애초 글자가 음각된 깊이의 절반 정도 깊이로 파여 있었다.

 초건비에 남아있는 글씨와 행주산성 충장사 앞에 세워져 있는 중건비의 비명을 비교해 보면 ‘원수권공행주대첩비(元帥權公幸州大捷碑)’가 쓰여져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중건비는 초건비 풍화가 심해지자 헌종 11년인 1845년 초건비와 같은 크기와 비명을 담아 다시 세워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 위원은 “이미 풍화가 많이 된 본문은 남겨두고 본문보다 글자 크기가 크고 선명한 비명을 일제가 정으로 3분의 2 가량 파낸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는 일제 패망 직전인 1943년 조선총독부가 각 도 경찰부에 전달한 ‘유림의 숙정 및 반시국적 고적의 철거’라는 문서로 확인된다.

 문서의 파괴 대상 기념비 목록에는 고양 행주전승비(지금의 행주대첩비)를 비롯해 운봉 황산대첩비,해남 명량대첩비 등 20여개가 있다.조선이 일본을 크게 이긴 전투를 기념하는 비들로,이중 일부는 실제로 폭파되거나 훼손됐다.

 행주대첩은 1593년(선조 26년) 권 율 장군이 군사 2천300명으로 일본군 3만여명과 치열한 접전을 벌여 마침내 승리를 거둔 전투다.이를 계기로 서울에 있던 일본군이 삼남 지방으로 내려가고,수세에 몰린 우리 군이 공세로 전환하는 결정적 전기가 됐다.

 정 위원은 “행주대첩비가 수도인 서울에서 가장 가까이 있는 데다 역사적,금석문적 가치가 큰 곳이어서 목록 중 첫번째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며 “일제가 빼앗아간 우리 문화재를 돌려받는 일도 중요하지만,이들이 망가뜨린 우리 문화유산을 회복시키는 일도 못지않게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초등학교 아이들을 대상으로 이곳에서 답사 프로그램을 운영중인 정 위원은 “우리 아이들에게 아름다운 역사만 가르치는 게 아니라 감추고 싶은,아픈 역사도 알려줘야 한다”고 덧붙였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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