美측도 수사에 적극 협조…핵심 피의자 조사·증거 확보 관건
지난 2일 밤 서울 도심에서 난동을 부리며 경찰관과 시민을 치고 달아난 미군이 사건발생 이틀 만에 범행을 시인하면서 경찰 수사에 속도가 붙고 있다.도주한 미군 일행 중 한명인 C(26) 하사는 4일 오후 서울 용산경찰서에 출석해 “D(23) 상병, F(22·여) 상병과 함께 비비탄 총을 쏘고 경찰 검문에 불응해 차를 타고 도주한 것이 맞다”고 시인했다.
과거 사건을 저지르고도 핵심 피의자의 출석을 미루고 범행에 대해서도 모르쇠로 일관했던 것과는 달리 미군 측도 피의자를 직접 특정해주는 등 적극적으로 수사에 협조하는 모습이다.
◇ 경찰 신속·강경한 수사 = 경찰은 현장에서 미군을 붙잡지 못했으나 차량번호를 확보해 미군 측에 소유주 확인을 강하게 요청했고, 미군 범죄수사대(CID)가 사건 발생 9시간만인 3일 오전 9시께 C하사를 경찰에 데리고 나와 한시간가량 조사에 응했다.
한미주둔군지위협정(SOFA)에 따라 미군을 조사할 때는 미국 대표부와 통역이 입회해야 하는데 당시에는 CID 만 입회해 조사를 제대로 하지 못했다.
그러나 경찰은 이들이 돌아간 직후 D상병의 신원까지 확인해 미군 측에 바로 다음날인 4일 오전까지 이들을 출석시키라고 요청했다.
이후 미군 측은 D상병이 경찰관이 발포한 유탄에 어깨를 다쳐 영내 병원에서 치료 중이라며 출석을 연기해 달라고 요청했으나 경찰은 D상병의 출석은 미루되 신원이 확인된 C하사는 출석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이에 따라 사건 발생 만 이틀이 되지 않아 C하사가 경찰에 출석했고, 뒤늦게 신원이 파악된 F상병도 경찰에 나와 조사를 받았다.
이들은 경찰 조사에 순순히 응했으며 대체로 혐의를 인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 미군 ‘물증’ 앞에 범행 시인 = C하사가 경찰에 나와 비비탄 총을 쏘고 검문에 불응해 도주한 사실, 경찰관을 들이받은 것까지 시인한 것은 범행을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줄줄이 나왔기 때문이다.
경찰은 사건 당시 차량번호를 파악해 즉시 소유주를 확인했고 4일 오전 이들이 버리고 간 도주 차량을 발견해 비비탄 총알까지 확인했다. 애초 사건이 시작된 이태원에서 이들의 얼굴을 본 시민도 많다.
D상병의 왼쪽 어깨에 박힌 총알이 당시 경찰관이 쏜 38구경 총탄에서 나온 것임이 확인되면 사건과의 관련성을 부인할 수 없는 증거가 된다.
지난해 7월 미 헌병들이 민간인에게 수갑을 채운 사건부터 지난달 지하철 성추행까지 미군 범죄가 이어지면서 국내 여론이 나빠진데다 서울 도심을 무법천지로 만들며 정복 경찰까지 차로 들이받은 이번 사건의 죄질이 워낙 나쁜 것도 미군이 경찰 수사에 적극 협조하게 한 요인이 된 것으로 보인다.
시민단체 등에서도 경찰이 미군범죄에 미약하게 대처한다는 비판이 나오면서 미군 처벌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는 상황이었다.
크리스 젠트리 주한 미8군 부사령관은 사건 다음날인 3일 용산경찰서를 방문해 사건에 대해 사과하고 수사에 전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미군 측은 경찰이 C하사의 아내로 파악하고 있던 차량 동승 여성을 F상병이라고 정정해주기도 했다.
경찰도 “미군이 이런 일로 한국과의 관계가 악화되는 상황을 극도로 경계하고 있다”며 “매우 협조적이고 요청자료도 즉각 보내주고 있다”고 말했다.
◇핵심 피의자 소환·증거 수집…아직 첩첩산중 = 범행 시인을 받아내는 것까지는 빠르게 이뤄졌지만 향후 추가 조사도 순조롭게 이뤄질지는 미지수다.
운전대를 잡고 경찰을 들이받는 등 범행을 주도한 것으로 보이는 D상병의 경찰 출석 일정이 잡히지 않았고 관련자들의 진술이 엇갈리거나 탄두·혈흔 증거가 이들의 범행을 뒷받침해주지 않을 가능성도 남아있기 때문이다.
미군 측이 음주 및 마약 복용 여부 조사에 응할지도 미지수다.
경찰은 미군에 D상병 어깨에 있는 유탄을 제거해 제출하라고 요구하면서 “아마 요청대로 될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미군 측에서는 유탄 제거 수술을 꺼리는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주범인 D상병은 치료 때문에 출석 일정조차 잡지 못했고 C하사와 F상병도 4일 조사를 마친 뒤 미 헌병대에 넘겨야 한다.
규정상 미군은 신병을 인도받아 구금하다가 경찰이 요청하면 언제든 이들이 출석하도록 해야 하지만 이 과정이 순탄하게 진행될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주한미군범죄근절운동본부 박정경수 사무국장은 “평택 수갑 사건의 경우 언론의 관심이 높을 때 미군 측이 사과했지만, 관련자들은 아직 기소되지 않고 있다”며 경계를 늦춰서는 안된다고 지적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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