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모던타임스’ 위로한 법원 판결

한국판 ‘모던타임스’ 위로한 법원 판결

입력 2014-04-17 00:00
수정 2014-04-17 1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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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름 범벅 작업복을 입고 빠르게 움직이는 컨베이어 벨트 앞에 서서 쉴 새 없이 나사못을 조이다가 그만 거대한 기계 톱니바퀴 속으로 빨려 들어간 찰리 채플린.

자본주의의 비인간성을 고발한 1936년 미국 풍자 영화 ‘모던타임스’의 유명한 장면이다.

박모씨 사연은 한국판 ‘모던타임스’라고 부를 만했다. 김치 공장에서 일한 박씨는 날마다 7∼8t에 달하는 배추를 컨베이어 벨트 위에 반복해서 올리고 절임통에 밀어넣는 작업을 했다.

박씨는 배추 절이는 일 말고도 쓰레기 처리와 세척 기계 청소, 열무·오이소박이 썰기, 깍두기 담기 등을 도맡았다. 박씨 부인은 “남편이 잠자는 시간 빼고 일만 했다”고 기억했다.

김치 생산량이 매년 증가함에 따라 박씨의 업무 강도도 세졌다. 박씨는 평일 13시간 넘게 근무하고도 토요일까지 공장에 나와야 했다. 일주일 평균 근무시간이 최소 63시간에 달했다.

이렇게 3년 동안 일하던 박씨는 지난 2011년 돌연사했다. 회사 기숙사에서 자다가 두통을 호소했는데, 뇌출혈이었다. 수술 후에도 회복하지 못한 박씨는 보름 만에 세상을 떠났다.

유족은 고인의 사망이 업무상 재해라며 근로복지공단에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청구했으나 거부당하자 소송을 냈다. 박씨의 사정을 충분히 파악한 법원은 유족 손을 들어줬다.

서울행정법원 행정7부(정형식 수석부장판사)는 “유족급여와 장의비를 지급하지 않기로 한 처분을 취소하라”며 유족이 근로복지공단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원고 승소로 판결했다고 17일 밝혔다.

재판부는 “컨베이어 벨트 라인에서 근무한 고인이 같은 위치에서 정해진 속도로 일정한 업무량을 계속해서 처리해 육체적인 체력 소모와 정신적인 부담이 상당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어 “고인이 업무 외에 다른 요인으로 사망했을 것으로 보이는 사정을 찾기 어렵다”며 “사망과 업무 사이에 상당한 인과관계가 있기 때문에 근로복지공단의 처분은 위법하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각각 자문을 맡은 의사 3명이 예외없이 과로와 스트레스 대신 나이와 체질, 평소 앓던 고혈압 등을 박씨의 뇌출혈 발병 원인으로 지목했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판결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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