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명 소설가 마광수 前연세대 교수 자택서 숨진 채 발견

유명 소설가 마광수 前연세대 교수 자택서 숨진 채 발견

조희선 기자
조희선 기자
입력 2017-09-05 22:24
수정 2017-09-05 22: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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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즐거운 사라’로 교단서 긴급체포…천재 교수서 외설 문학가로 ‘나락’

자살 가능성 커…가족이 신고
“유산·시신 처리해 달라” 유언장

“하늘이 원망스럽다. 위선으로 뭉친 지식인과 작가 사이에서 고통받는 것이 너무나 억울해지는 요즘이다. 그냥 한숨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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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전 교수가 1994년 연세대에서 강의하는 모습. 당시 마 전 교수는 음란문서 제작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연합뉴스
마 전 교수가 1994년 연세대에서 강의하는 모습. 당시 마 전 교수는 음란문서 제작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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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에 대한 가감 없는 표현이 담긴 소설 ‘즐거운 사라’로 유명한 마광수 전 연세대 교수는 지난해 8월 정년 퇴임을 앞둔 소감문을 이렇게 마무리했다. 등단 이후 40년간 여러 소설과 산문집, 시집을 냈지만 ‘즐거운 사라’가 대표작으로 꼽히는 것은 이 작품으로 치명적인 필화에 휘말린 탓이다. 최고의 윤동주 연구자, 천재교수로 추앙받다가 산문집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1989년) 이후 외설 문학가라는 오명에 휩싸이며 구속, 해직, 복직 등을 겪었던 마 전 교수가 5일 자택에서 목을 매 지난한 생을 마감했다. 66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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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 전 교수가 2010년 4월 26일 서울 종로구 한성아트홀에서 열린 연극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의 제작 보고회에 참석해 기자들의 질문을 듣고 있는 모습. 이 연극은 마 전 교수의 동명 에세이를 원작으로 했으며, 마 전 교수도 연극에 출연했다. 연합뉴스
마 전 교수가 2010년 4월 26일 서울 종로구 한성아트홀에서 열린 연극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의 제작 보고회에 참석해 기자들의 질문을 듣고 있는 모습. 이 연극은 마 전 교수의 동명 에세이를 원작으로 했으며, 마 전 교수도 연극에 출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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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용산경찰서에 따르면 마 전 교수는 이날 오후 1시 51분쯤 서울 용산구 동부이촌동의 한 아파트에서 숨진 채 발견됐다. 그는 가사도우미와 함께 지내왔으며, 도우미가 잠시 집을 비운 사이 숨진 것으로 조사됐다. 가족의 신고를 받고 현장에 출동한 경찰은 자신의 유산을 가족에게 남기고 시신 처리를 맡긴다는 내용이 적힌 A4용지 1장짜리 유언장을 발견했다. 경찰은 마 전 교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고 자세한 경위를 조사하고 있다. 빈소는 용산구 순천향대 서울병원에 마련됐다. 마 전 교수는 1990년 1월 합의이혼했으며 자녀는 없다. 누나가 상주를 맡았다.

아호가 ‘광마’(狂馬)인 마 전 교수는 우리 사회 금기에 도전했다가 시대와의 불화를 혹독하게 겪은 비운의 시인이자 소설가, 수필가, 또 비평가로 기억된다. 연세대 국문과 대학원 박사 과정을 밟던 1977년 청록파 시인 박두진의 추천을 받아 현대문학에 ‘배꼽에’ 등 시 6편을 게재하며 등단했다. 1983년에는 같은 대학원에서 박사 논문으로는 처음으로 윤동주 시를 연구해 학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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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듬해 모교 강단에 서기 시작한 그는 성(性)에 대한 표현의 자유를 외치며 우리 안의 이중성과 위선을 꼬집는 데 천착했다. 28세에 대학교수로 임용되면서 천재로도 불렸다. 1989년 5월부터 12월까지 문학사상에 장편 ‘권태’를 연재하며 소설가로 데뷔했고 같은 해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를 출간했다. 대표 시집 ‘가자, 장미여관으로’가 나온 것도 그해다. 그는 한국 사회에서 성적 담론을 대중적 리얼리티의 세계로 이끈 공로가 크다는 평가를 받기도 했다. 한 문학평론가는 “마 전 교수는 당시 유교적인 엄숙주의에 빠져 있었던 한국 문화에 가벼운 충격을 준 작품을 선보였다”면서 “소설이나 시를 일종의 본능의 해방과 자유의 구가라는 관점에서 이해할 때, 그가 작품에서 성의 문제를 노골적으로 표현했다는 이유만으로 사회적인 제재를 받은 것은 지나친 부분이 있다”고 말했다.

마 전 교수는 ‘즐거운 사라’가 사회 미풍양속을 해치는 외설이라는 이유로 1992년 10월 강의 중 제자들 앞에서 긴급 체포됐다. 구속 뒤 재판에서 유죄가 확정되며 교수직을 박탈당했다. 1998년 사면·복권돼 강단으로 돌아왔지만 ‘변태 교수’, ‘음란 작가’라는 꼬리표는 줄곧 그를 따라다녔다. 해직 이력 때문에 명예교수가 될 자격조차 얻질 못했다. 그때 심경은 퇴임 소감문에 고스란히 담겼다.

그는 “즐거운 사라 사건으로 학교에서 잘리고, 한참 후 복직했더니 동료 교수들의 따돌림으로 우울증을 얻어 휴직했다”면서 “그 뒤 줄곧 국문과 왕따 교수로 지냈고, 문단에서도 왕따가 됐다”고 썼다. 또 “책도 안 읽어 보고 무조건 나를 변태로 매도하는 대중들, 단지 성을 이야기했다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따라다니는 간첩 같은 꼬리표”라면서 “그동안 내 육체는 울화병에 허물어져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다. 지독한 우울증은 나를 점점 좀먹어 들어가고 있고 오늘도 심한 신경성 복통으로 병원에 다녀왔다. 몹시 아프다”고 토로했다. 실제 마 전 교수는 우울증 약을 처방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광마집’, ‘사랑의 슬픔’ 등의 시집을 냈던 그는 올해 초에는 등단 40년을 맞아 ‘마광수 시선’을 내놓았는데 유작이 됐다. ‘권태’, ‘불안’, ‘첫사랑’ 등 소설과 다수의 비평집, 논문들을 남겼다.

박재홍 기자 maeno@seoul.co.kr

조희선 기자 hsncho@seoul.co.kr
2017-09-06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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