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박완서 선생이 영면에 들었습니다. 지상에서의 여든 해를 이름 없는 사람들과 함께했고, 그런 처신을 삶의 중요한 가치라 믿었기에 문단의 권력과도 거리를 뒀던, 참으로 고결한 삶이었습니다. 그를 앗아간 병은 담낭암이었습니다. 신간스러운 세상, 상담(嘗膽)의 일이 많았던 탓일까요. 그로부터 얼마간 시간이 지났지만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느끼는 상실감은 여전히 만장(萬丈)의 적설처럼 무겁습니다.
알다시피 암은 인체의 반란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기며, 드러나는 징후도 없습니다. 마치 암습처럼 은밀하게 몸 속에 똬리를 틉니다. 그러다 한 순간 치명성을 드러내는데, 그 준동하는 모습이 마치 날뛰는 게릴라 같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암에 둔감합니다. “내게 암이 생길 리가….”라거나 다른 사람이 겪는 암의 고통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믿습니다. 가당찮은 자신감이지요.
특히나 암은 인간의 심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그러면서도 너무 흔해진 병입니다. 그런 암의 위협 속에서 태어난 소임을 다하려면 평소 스스로를 잘 갈무리해야 합니다. 꼼꼼히 건강을 살피는 것은 물론 가끔씩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미처 정리하지 못한 일은 없나 살필 필요도 있겠지요.
삶이 잘 짜여진 직물처럼 가지런하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헝클어져 실마리조차 찾기 어려운 털실 뭉치 같다면 지금이라도 올을 추려 정리할 것 정리하는 게 잘하는 일 아닐까요. 낡은 신문에서 박완서 선생의 영결 기사를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삶이 지난하지만 간결하고 청아할 수 있다면 그만한 복도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다 건강을 더할 수 있다면 새삼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jeshim@seoul.co.kr
알다시피 암은 인체의 반란입니다.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생기며, 드러나는 징후도 없습니다. 마치 암습처럼 은밀하게 몸 속에 똬리를 틉니다. 그러다 한 순간 치명성을 드러내는데, 그 준동하는 모습이 마치 날뛰는 게릴라 같습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암에 둔감합니다. “내게 암이 생길 리가….”라거나 다른 사람이 겪는 암의 고통이 자신과는 무관하다고 믿습니다. 가당찮은 자신감이지요.
특히나 암은 인간의 심신을 황폐하게 만드는, 그러면서도 너무 흔해진 병입니다. 그런 암의 위협 속에서 태어난 소임을 다하려면 평소 스스로를 잘 갈무리해야 합니다. 꼼꼼히 건강을 살피는 것은 물론 가끔씩은 지나온 길을 되돌아보며 미처 정리하지 못한 일은 없나 살필 필요도 있겠지요.
삶이 잘 짜여진 직물처럼 가지런하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꼭 그렇지는 않더라도 헝클어져 실마리조차 찾기 어려운 털실 뭉치 같다면 지금이라도 올을 추려 정리할 것 정리하는 게 잘하는 일 아닐까요. 낡은 신문에서 박완서 선생의 영결 기사를 읽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비록 삶이 지난하지만 간결하고 청아할 수 있다면 그만한 복도 없을 것입니다. 거기에다 건강을 더할 수 있다면 새삼 무엇을 더 바라겠습니까.
jeshim@seoul.co.kr
2011-02-28 24면
Copyright ⓒ 서울신문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재배포, AI 학습 및 활용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