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는 흔적을 말한다] (11) 자살 같았던 사건의 진실

[범죄는 흔적을 말한다] (11) 자살 같았던 사건의 진실

입력 2011-06-29 00:00
수정 2011-06-29 0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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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 튄 흔적 없는 깨끗한 현장… ‘생활반응’ 없는 손목 상처… ‘자살 위장한 타살’을 말한다

“여기 방이동(서울 송파구)인데요, 노래방 문 좀 따주세요.” 2010년 9월 20일 밤 10시. 119신고센터에 20대 여성의 다급한 요청이 들어왔다. 닷새 전 노래방 문을 연다고 나간 A(당시 46세)씨를 애타게 찾던 첫째딸(당시 28세)의 목소리였다. 구조대가 급히 달려간 지하 노래방은 앞뒤로 굳게 철문이 닫혀 있었다. 119 대원이 한참을 씨름하던 잠금장치를 절단하고 문을 열자 고약한 냄새가 확 풍겼다. 뭔가 썩는 냄새였다. 노래방 주인 A씨가 가족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끝내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되는 순간이었다.


자살이었다. 한눈에 들어온 현장은 그랬다. 시신이 누워 있던 노래방 내실 탁자에서는 유서가 담긴 흰 봉투와 먹다 남은 소주병 2개가 나왔다. A4 용지 2장 분량의 유서에는 구구하게 긴 사연이 담겨 있었다. 1년 전 남편 유산으로 시작한 노래방이 생각만큼 잘 안돼 속상하다는 이야기로 시작해 3남매가 엄마 마음을 몰라줘 섭섭했다는 사연, 자신은 재미있게 살지 못했지만 자식들은 서로 의지해 가며 정겹게 인생을 살라는 당부 등이 이어졌다. 노래방과 살던 집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 숨겨놓은 통장은 어디에 있는지, 출금 비밀번호는무엇인지 등도 적혀 있었다. 컴퓨터 워드프로세서로 인쇄돼 마지막에 도장까지 찍힌 유서는 남이 썼다고는 상상도 못할 만큼 세세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자살이라고밖에는”… 유서 2장과 소주병

A씨의 왼쪽에는 피묻은 칼이 놓여 있었다. 노래방 부엌에 있던 식칼이었다. 칼은 명치와 왼쪽 손목 2군데에 상처를 냈다. 치명상은 명치 쪽인 듯했다. 정황상으로 보면 A씨는 평소에 자살을 고민해 왔고, 결국 어느 날 노래방 문을 잠그고 술을 마신 뒤 1차로 손목을 2차례 긋고 나서 다시 명치 부위를 스스로 찌른 것으로 보였다.

자칫 억울하게 묻힐 뻔했던 A씨 피살의 한을 풀어 준 사람은 베테랑 형사였다. 자살 치고는 현장이나 시신이 지나치게 깔끔했다. A씨가 자살한 쪽방은 성인 2명 정도가 겨우 누워 잘 수 있는 크기. 그나마 가로로는 누울 공간조차 나오지 않을 만큼 좁은 방이었지만 벽에 피가 튄 흔적이 전혀 없었다. 바닥에 고여 있는 혈액의 양도 이상하리만큼 적었다.

●“최후 순간에는 주저하기 마련, 그러나…”

피해자의 몸에 난 상처도 주저흔(hesitation marks) 하나 없이 지나치게 깨끗했다. 주저흔이란 자살하려는 사람이 한번에 치명상을 만들지 못하고 여러 차례 자해한 흔적을 남기는 것을 말한다. 주로 치명상 주위에 생기는데 송곳에 찔린 듯한 작은 것부터 1~2㎝까지 많게는 수십개가 남기도 한다. 국립과학수사연구원 관계자는 “사망자의 몸에 칼에 찔린 상처가 많고 외부로 흘러나온 혈액이 많으면 타살로 간주하기 쉽지만 자살인데도 그렇게 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면서 “흉기로 자살하려는 사람은 고통 없이 빨리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치명적인 곳을 못 찾거나 주저하게 돼 스스로 여러 곳에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세 자녀도 “자살이 아니다.”라고 단언했다. A씨가 워낙 솔직하고 화통해 우울증이나 자살과는 거리가 먼 데다 유서도 어색하다고 했다. 유서에는 “내가 글씨를 잘 못써 PC방 점원에게 워드(워드프로세서)를 배웠는데, 유서 쓰는 데 2시간이 넘게 걸렸다.”고 돼 있었다.

하지만 자녀들은 컴퓨터를 전혀 모르는 엄마가 어느 결에 워드를 배웠는지도 의문이고, 굳이 유서를 워드로 작성한 것도 이해되지 않는다고 했다. 특히 유서 속 단어들이 평소 엄마의 말투와 전혀 달랐다.

●생활반응이 말해 주는 사건의 진실

A씨의 시신에 대해 부검 결정이 났다. 치명상은 가슴에 난 창상이었다. 찔린 곳은 한 곳이었지만 칼이 만든 상처의 끝부분이 묘하게 변해 있었다. 치명상을 입히려고 같은 곳을 정확하게 두 번 찔렀을 때에나 생기는 현상이다. 자살하는 사람이 스스로 치명상이 난 곳을 정교하게 찾아 두 번 칼을 찌를 리 없다.

자살 현장이 조작됐음을 말해주는 결정적인 증거는 시신 왼쪽 손목의 상처였다. 손목을 그어 자살을 시도했다는 A씨의 상처에 ‘생활반응’(生活反應·특정 충격에 대해 살아 있는 몸이 보이는 반작용)이 나오지 않았다. 너무 적은 출혈량 등을 감안했을 때 살아있는 상태에서 손목을 그었다기보다는 자살로 위장하기 위해 만든 가짜 상처로 결론났다.

하지만 의문은 계속됐다. 범인이 누구이기에 통장 비밀번호는 물론이고 남의 가족사를 줄줄이 꿰고 있을까. 그렇다면 범인은 3남매 중 하나일까. 주변인물을 대상으로 수사가 시작됐다. 정작 범인 색출은 싱겁게 마무리됐다. 유서 봉투에서 둘째 딸(당시 25세)의 헤어진 동거남(당시 25세)의 지문이 나왔다. A씨 사망현장에 그가 있었다는 얘기다. 친척집에 숨어 있던 동거남은 순순히 범행 일체를 자백했다. 그는 1년 넘게 A씨의 둘째딸과 동거를 해왔지만 최근 자주 다투면서 때리기까지 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는 사건이 나기 한달 전 동거녀가 가출하자 노래방에 찾아가 “딸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했지만 A씨에게 면박을 당한 뒤 모욕감에 범행을 결심했다. 그는 “결혼식은 못 치렀지만 1년 이상을 사위처럼 살면서 집안 대소사를 챙기고 상주 노릇까지 했는데 장모가 나에게 너무 모질게 대했다.”고 말했다고 한다.

유영규기자 whoami@seoul.co.kr

2011-06-29 23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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