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민경 경제부 기자
서울보증보험(SGI보증보험)에 15년째 채무를 지고 있다는 한 60대 남성은 30분 동안 ‘독수리 타법’으로 한 글자 한 글자 썼다며 사연을 전했다. 그는 수입도, 재산도 없다고 했다. 빚을 지고 있는 상황에서 병까지 얻었다. 근근이 자식들에게 한 푼 두 푼 용돈을 받아가며 하루하루 죄스러운 마음으로 살고 있다고 했다. 갑작스러운 사업 실패와 질병은 그를 부끄러운 아빠로 만들었다. 그 와중에 행복기금 소식을 듣고 얼른 보증보험 측에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그는 보증보험 측에서 “우리와 (행복기금과는) 상관없으니 알아서 하라”는 소리를 들었다며 하소연했다. 이젠 더 이상 자식들 볼 면목조차 없다는 그.
안타까운 마음에 보증보험 측에 전화를 걸어 사실 여부를 직접 확인했다.
보증보험 측은 “아직 기금 기준이 최종 확정되지 않은 만큼 우리가 참여할지 말지 논의조차 안 된 상황이라 아마도 그런 말을 전하던 과정에서 오해가 있었던 것 같다”고 설명했다. 참여 대상이 될지 안 될지를 두고 금융사 내부에서도 혼란이 많은 것이다.
다른 30대 남성은 이메일을 통해 분노의 감정을 드러냈다. “왜 매번 금융건만 회생·회복이 되는지 모르겠다. 국세는 왜 해당이 안 되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우선 국세부터 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글을 보내왔다.
‘빚 탕감’ 혜택을 받는 이들은 한정적이다. 정부는 은행, 카드·할부금융사, 저축은행, 상호금융사, 보험사 등 제도권 금융은 물론 대부업체의 연체채권까지 일괄 매입, 최대 70%까지 빚을 탕감해 채무를 조정한다는 방침이다. 그러나 매입대상은 지난 2월 말 현재 6개월 이상 원리금 상환이 연체된 1억원 이하 채권에 국한된다. 아직 정확히 몇 만명이 대상이 될지도 특정되지 않았다. 정부가 금융사와 협의를 통해 정해야 한다.
그래서 행복기금은 또 다른 누군가에겐 불행기금으로 불린다. 대상이 되지 못하는 다른 신용불량자들에게 상대적 박탈감을 안겨서다. 같은 금액을 같은 금융사에서 빌렸는데 간발의 시간 차이로 제외되는 경우 등이다. 금융권도 볼멘소리다. 정부가 의견 수렴도 제대로 거치지 않은 채 협약 체결만 강요하고 있다고 한다.
일부 저축은행 피해자들은 “누구는 선의의 피해를 입고도 구제를 못 받는데 왜 신용불량자 구제를 금융권이 아닌 정부가 주도하는 행복기금에서 하는지 모르겠다”고 볼멘소리를 했다. 시장 혼란도 심각하다.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부실채권 범위도, 매입 시기도 확정되지 않은 탓이다.
행복기금의 운영과정이 치밀하고 공정하게 이뤄져야 하는 이유다. 기금 지원이 전부가 아니다. 정부는 일자리 지원과 창업 등 사후관리까지 철저하게 연결해 주고 채무자들이 자립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개인 빚을 국가가 갚아주는 것은, 누군가의 눈물 위에 올려 있을 마지막 기회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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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3-2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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