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이여, 아날로그의 옷을 입어라!
2030년의 어느 날, 어두운 방 안, 병풍 속에서 이어령 선생이 뚜벅뚜벅 걸어 나왔다. 방 안에는 가족들인 듯, 낯익은 모습들이 조용히 앉아 그 모습을 경이롭게 지켜보고 있었다. 이어령 선생은 활짝 웃으며 나직하게 말했다.이어령의 눈빛 속에 번쩍이는 또 하나의 창조는?
얘기를 마친 이어령 선생은 홀연 사라졌다. 가족들은 생전의 모습을 본 듯 반가워했다. 선생의 따스한 정을 느끼며 선생에 대한 얘기꽃을 피웠다.
이어령 선생이 직접 대본을 쓰고 기획한 디지로그 사물놀이 “죽은 나무 꽃 피우기” 공연(1월 27일~1월 31, 광화문아트홀)이 끝난 며칠 후, 인터뷰를 위해 광화문에 있는 한중일 비교문화연구소를 찾았다. 어린 시절 선생의 책을 통해 문명을 보는 새로운 시각을 접하고 흥분했던 필자에게 선생은 늘 새로움의 대명사였다. 선생에게서는 늘 파릇파릇한 무엇인가가 느껴졌다.
역시나! 명함을 주며 인사를 나누는데 명함의 영문 이름이 크게 들어왔다.
<죽은 나무 꽃 피우기> 중 국수호 춤
먼저 이번 공연의 의의부터 묻지 않을 수 없었다.
“88올림픽 개막행사에서의 굴렁쇠 소년, 새천년을 맞이해서 밀레니엄베이비 탄생 중계, 그리고 이번 공연이 모두 일맥상통한 점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언뜻 이해하기 곤란할지 모르지만 나로서는 오래 전부터 외쳐왔던 것입니다. 디지털 문명이 지금 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데 그럴수록 생명의 소중함, 아날로그적 세계의 소중함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지요.”
공연은 이어령 선생이 홀로그램으로 등장하여 인사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사전 지식이 없는 사람이 보면 영락없이 실제인물이 등장하는 줄 알고 착각할 정도이다. 이어 디지털 문명으로 황폐화된 사막에 반 고흐의 그림에 나오는 찢어진 구두가 나오고 거기에 새가 알을 까고 생명을 탄생시킨다(이번 공연에서는 구현되지 못했다).
4계절의 순환으로 봄이 되면 개구리가 객석으로 튀어오르고 새싹이 피어난다. 여름 해변에는 아리따운 비키니 아가씨가 사물놀이 장단에 맞춰 춤을 춘다. 화면에는 천둥 번개가 치고 비가 내린다. 안숙선의 창에 나뭇잎들이 춤을 추고 국수호의 춤에 바람이 호응한다. 4명의 김덕수(3명은 홀로그램이다)가 나와 협연을 벌이기도 한다.
피날레에서는 연주와 관객의 박수에 의해 죽은 나무에서 꽃이 피며 매화향이 객석 가득 퍼져나간다.
이번 공연을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적 감성의 조화를 꾀한 퍼포먼스라 부르고 싶었다. 선생이 오래 전부터 말해왔던 디지로그란 무엇인가.
“콩 심은 데 콩 나는 세계가 아날로그 세상이라면 디지털 세계는 키보드만 치면 콩도 나오고 팥도 나오는 세계입니다. 산업문명은 200년도 안 되었지만 우리 몸은 몇 만 년이 걸렸어요. 우리는 어릴 적 엄마 젖을 빨면서 그 황홀한 감촉을 느낍니다. 그런데 디지털에서는 그런 황홀한 감성이 없어요. 디지로그란 디지털을 거부하고 아날로그로 돌아가자는 얘기가 아닙니다. 디지털 기술을 이용하되 아날로그적 감성을 느끼게 하자는 것이지요.”
어떤 것을 새롭게 시작하려는 사람은 늘 칭찬보다는 비판을 많이 듣게 된다. 이번 공연에서도 칭찬보다 비판이 많았던 것이 사실이다.
홀로그램으로 보는 김덕수
이어령 선생이 이 대목을 말하면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면서 잠깐만 기다리라고 한다. 5월에 열리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예술교육대회에서는 보다 완성도 높은 작품으로 찾아올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살아오면서 많은 새로운 것들을 접한다. 필자의 경우 커피 자판기를 처음 봤을 때가 생각난다. 동전을 넣고 버튼을 누르면 커피가 쏟아질 것 같아서 주변에 있던 빈 컵을 넣었더니 자판기에서 컵이 또 나오는 것이 아닌가. 현금인출기, 휴대폰, 컴퓨터 등이 내 삶에 새로 등장한 것들이었다. 기계치에 가까웠던 한 사람으로서 새로운 문명의 이기들이 나타날 때마다 편리하기보다 먼저 부담으로 다가왔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이어령 선생과 얘기를 나눌수록 이 나이 드신 젊은이의 창조정신, 새로운 것에 대한 끊임없는 탐구정신이 부러웠다. 생각이 현실화 되는 것이 점점 빨라지는 시대가 될 것 같다.
“인간이 만든 기술은 공업용으로 개발된 것도 나중에는 일상화됩니다. 시계도 처음에는 시계탑이라고 해서 마을에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모두 다 차고 있는 것처럼. 앞으로 제사 지낼 때 사진 걸어놓는 대신 홀로그램으로 나오는 시대가 될 겁니다. 대통령의 연설도 홀로그램으로 하고 마이클 잭슨의 공연 같은 것도…. 하지만 인간이 만드는 기술이 아무리 훌륭하다고 하더라도 생명체 기술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모기가 사람 물 때 안 아프지만 주사 놓으면 아프지 않아요?”
이어령 선생은 창조학교 명예교장이기도 하다. 그의 창조정신은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창조를 이해하면 창조가 되겠어요? 창조는 리스크가 따르고 힘들지요. 그냥 이대로 편하게 살면 좋잖아요? 그런데 이렇게 살 수 없을 때 창조가 생깁니다. 낭떠러지에 있을 때, 서 있을 수도 기어갈 수도 없을 때, 날 수밖에 다른 수가 없을 때 창조가 일어납니다. 그러니까 창조라는 말은 외로운 말이고 불행한 말입니다. 행복한 사람은 창조 안 해요.”
‘끊임없이 창조하라, 고되고 힘들더라도 창조하는 인간이 되어야 한다.’ 이런 말이 나올 줄 기대하고 있었는데 의외의 답변이 나온다. 어쩌면 이제까지 치열하게 창조해 온 사람만이, 그 속에서 고독할 수밖에 없었던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일 것 같기도 하다. 마지막으로 앞으로의 문명은 어떤 식으로 진행될 것인지 물어봤다.
“성경에 보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근심하지 말라 그랬는데, 우리는 이제까지 그것만 근심하고 살아왔습니다. 모든 정치 경제 사회는 그것을 위해 존재해 왔습니다. 이제까지는 빵을 만드는 사람이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앞으로는 생명이 더욱 중시되는 시대가 될 것입니다. 전자를 리빙(living)이라고 한다면 후자는 라이프(life)라고 할 수 있겠지요. 나는 그것을 생명자본주의라고 말했는데 이번 디지로그 사물놀이도 생명의 약동을 4D로 보여준 것입니다. 김연아가 우리에게 주는 기쁨을 생각해 보면 쉽게 이해가 될 것입니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 새로운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는 데 보다 적극적이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폰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글_ 김창일 기획위원
TIP
우리 시대 최고의 문화 아이콘들이 선보이는 디지로그 사물놀이
<죽은 나무 꽃 피우기>
창조적 상상력의 대명사인 이어령 박사가 최신 디지로그 이론과 아이디어로
직접 공연대본을 쓰고 기획한 최초의 4D공연이 지난 1월 27일~1월 31일 광화문아트홀에서 열렸다.
사계절에 따른 생명의 약동을 노래하고 춤추고 연주한다.
연희자들은 홀로그램으로 또는 실제로 등장하여 홀로그램과 함께 연주하고 춤추고 노래한다.
어느 것이 실제 모습이고 어느 것이 홀로그램인지 모를 정도로 관객들을 탄성 속으로 몰아넣는다.
여기에는 디지로그 기술의 개척자인 디스트릭트(대표 최은석)의 홀로그램 4D 디지털 기술과
전통공연예술 전문 기업인 난장컬쳐스(대표 주재연)가 아날로그 제작에 참여하여 꿈을 현실화시켰다.
방송과 영화의 경우 3-D용 안경을 착용하고 스크린 상의 입체영상을 감상하는 식이지만
이번 디지로그 사물놀이는 안경 없이 눈앞에서 바로 홀로그램의 입체감을 느낄 수 있으며
무대 위에서 실제 연주자와 시간을 뛰어넘어 4차원의(4-D) 앙상블 퍼포먼스를 연출했다.
가상과 현실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예술과 기술이 융합된 새로운 디지로그 공간을 창조한 것.
사물악기의 소리의 강도, 연주자들의 움직임에 반응하는 센서 기술을 활용하여
연주자들의 공연 형태와 관객의 박수 소리에 따라 실시간으로 영상이 변하는 것도 볼만하다.
미리 제작된 영상에 맞춰 퍼포먼스가 구성되는 것이 아니라 실시간으로
디지털 기술과 아날로그 신명이 어우러지기 때문에 매번 공연마다 조금씩 영상이 변할 수 있다.
관객들의 반응에 따라서도 3-D 이미지가 변한다. 연주자들의 다이내믹한 공연과 더불어
관객들의 박수 등 현장감이 중시되며 피날레 부분에 매화꽃이 피어
지상으로 펼쳐질 때 그윽한 매화향이 객석을 가득 채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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