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따라 바람따라 맛따라] 호랑이해에 찾은 호랑이마을

[길따라 바람따라 맛따라] 호랑이해에 찾은 호랑이마을

입력 2010-03-14 00:00
수정 2010-03-14 1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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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랑이가 마을로 들어왔다- 경기도 안성 복거마을

담장과 나무의 관계/윤성택

담장 틈에서 나뭇가지는

가늘게 몸을 떨었다

아주 천천히 금이 자라도 좋았다

바람조차 알 수 없는 금의 방향은

담장의 천형이었다

상처를 제 안에 새기며 견디는,

담장 곳곳 나무의 실뿌리가 번졌다

그 틈으로 수액처럼 물이 올랐고

바람 불 때마다 조금씩 흔들렸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면서

나무는 말라가고 있었다

날이 풀리자 기어이 담장은

금 밖으로 무너져 내렸다

나무가 활짝 몸을 열었다

검은 금들이 가지로 뻗어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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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의 회색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 ‘호랑이 담배 피는 시절’
창고의 회색 담벼락에 그려진 벽화 ‘호랑이 담배 피는 시절’
어느 담벼락 아래 꽃을 처음 본 햇살이 이러했을까. 봄은 사방으로 번져가는 경이에 바람을 섞으며 다가온다. 영혼이 스민 대지에서는 지금 시간마저 비좁다. 익숙한 거리, 낯익은 지도에 갇혀 일상이 갑갑하다면 카메라에게 여행을 허락하는 것이 어떨지. 낱낱을 저장하는 메모리칩처럼 행로를 채워갈 기억이 찰칵, 셔터를 누를 때마다 고요한 흥분과 함께 채집될 것이다. 가끔은 이 적요가 거칠어 한쪽 눈을 감으면 불편한 현재는 프레임 속에서 아득하게 멀어진다. 더 이상 움직이지 않는 시간은 추억에 인화되어 먼 훗날 다른 한쪽 눈으로 보내질 것이다. 카메라는 혼자서 가야할 길과 떠나지 못한 날들을 위해 지금 우리에게 마지막으로 파일을 전송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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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의 굴곡진 면까지 입체적으로 고려한 호랑이 그림
담장의 굴곡진 면까지 입체적으로 고려한 호랑이 그림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신양복리 복거마을. 이곳의 옛지명 복호리(伏虎里)는 마을을 감싸고 있는 뒷산이 호랑이가 엎드려 있는 형세라 하여 지어졌다. 실지로 마을에 호랑이가 자주 내려왔다는 전설도 있고 그 호랑이가 무서워 벌벌 떠는 개의 형상을 닮은 ‘개숲재’도 있었다고 한다. 경인년, 복거마을을 여유롭게 걷다보니 색다른 봄이 느껴진다. 도로 옆 옹기종기 집들이 모인 한적한 이 시골에서 호랑이를 만나는 상상. 각양각색의 호랑이 작품들이 소박한 시골 풍경에 절묘하게 깃들어 있다고나 할까. 벤치, 담장, 지붕, 전봇대 할 것 없이 호랑이의 흔적이 곳곳에 있다. 이 마을에서의 산책은 이를테면 지친 일상의 숨을 고르며 맞닥뜨리는 예기치 못한 호랑이와의 대면이다.

호랑이가 마을로 들어왔다. 마치 털을 고르기 위해 그늘로 느릿느릿 들어서듯 마을로 내려왔다. 호랑이가 시간 밖을 배회한 지는 오래된 일이지만, 벽에 머리를 비비다가 앞발로 제 목덜미를 긁으면서 사람의 시선에 슬그머니 등장한 것이었다. 호랑이는 마을 어디든 가지 않은 곳이 없다. 지붕 위를 거닐기도 하고, 벽 속을 나와 전봇대나 도로 모퉁이 반사경에 머물기도 한다. 그리고 까닭 없이 옆길로 사라진다. 호랑이에겐 발톱으로 할퀼 만한 곳이 아니므로, 좁은 아스팔트 길 멈춰 서서 무심히 이곳을 바라보리라. 오렌지 빛깔 사이 흘러내린 무늬가 일렁일 때, 그 심장소리가 이웃 보일러에서 들리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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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천을 복개하고 만든 ‘호랑이 난간’
개천을 복개하고 만든 ‘호랑이 난간’
호랑이는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때와 장소에 불쑥 나타났다 사라지곤 한다. 어쩌면 호랑이는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조금은 두려웠는지도 모른다. 1924년 1월 21일, 호랑이는 강원도 횡성 산중에서 포획되어 사진으로 찍힌 이후 공식적으로 사라졌다. 1998년 화천의 두메산골에서 주민들에 목격되었다는 이야기도 있었고, 1989년 DMZ에서 미군의 레이더 시스템에 촬영되었다는 소문만 있을 뿐 이후 바람처럼 덧없이 출현할 따름이었다. 어슬렁거리는 호랑이의 궤적을 따라 복거마을 햇볕이 고요하게 내려앉는 오후, 이때쯤이면 카메라에 댄 한쪽 눈으로 낮고 굵은 톤의 그르렁 소리를 엿볼 수도 있을 것이다.

평범한 시골이었던 이곳이 호랑이가 사는 마을이 된 것은 2007년부터이다. 복거마을이 옛 복호리임을 착안, 예술가와 대학생들이 찾아와 주민들과 협업하며 역동적인 미술관으로 만들기 시작했다. 할머니가 스케치북에 난생 처음 그림을 그리거나 자기 이름을 문패에 새기기도 했다. 마을 입구의 조형물은 냄비와 솥뚜껑 폐농기구와 드럼통 등으로 만들어졌고, 판화로 마을지도가, 민화 벽화 등이 차례차례 그려졌다. 나쁜 기운을 몰아내듯 부적처럼 때로는 용맹스럽게 때로는 해학적으로 표현되어, 매서운 눈매가 있는가 하면 반달 모양이 있기도 하고 지붕에서 닭을 향해 앞발을 익살스럽게 흔들기도 한다. 개천을 덮은 주변에는 줄지어 무리를 이룬 모양의 난간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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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주민들을 모두 등장 시킨 벽화
동네 주민들을 모두 등장 시킨 벽화
이제 호랑이는 비가 오고 눈이 오고 계절이 바뀌어도 여전히 그곳에 있다. 초콜릿 빛 줄무늬 실루엣은 낡은 처마의 회색 담벼락에도, 막다른 골목에도, 연두색 지붕 위에도 어렵지 않게 나타난다. 생각을 집중하면 바람에 미세하게 흔들리는 수염 끝이나, 오롯이 빛나는 송곳니도 볼 수 있다. 사람들이 오가고 서성거려도 마을의 담장과 벽을 통과하다 서녘의 벽에서 물끄러미 저녁해를 바라볼 것이다. 그러다 태풍이라도 닥쳐오는 날이면 빗속에서 포효하며 집들과 길을 지킬 것이고, 마을에 초상이 있는 날이면 그 어르신을 등에 태워 좋은 묏자리를 찾아줄 것이다. 호랑이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두 다리를 쭉 펴 기지개하듯 존재하면서 결코 백두대간을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호랑이는 한반도와 한 몸이고 상징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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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과 나무의 관계
담장과 나무의 관계
매순간 깨어 있는 카메라를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은 나를 가장 멀리 떠나서 있다. 낯선 미지의 시간이 내게서 안주하지 못할 때 생은 기록할 만한 우연을 저장한다. 아무도 생각지 않는 사물을 보거나 이정표가 사라진 곳에 머무른 적이 있는 사람은 운명에 있어 정밀한 화소를 가질 수 있다. 여행에 돌아와 찍어온 사진파일을 열어보며 이편에서 그 바람 냄새를 맡아본다. 기억이 촉수를 뻗어가는 곳, 모든 오감이 방안에 맴돌며 휘돌아가듯 만져진다. 천천히 그리고 쓸쓸하게 걸어본 그 길에 여태 보지 못했던 것을 보게 되는 기분. 한 장의 사진 속에서 다시 시간을 거니는 여정이 시작되곤 하는 그것을, 나는 여행의 속성이라 부르고 싶다.

글·사진_ 윤성택 시인




TIP

복거마을은 2007년 2월 신양복리 일대 6개 마을과 함께 행정안전부의 ‘살기좋은 지역만들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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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범사업 지역으로 선정되면서 호랑이 마을로 거듭났다.

7개 마을 모두를 통틀어 순수 우리말로 ‘뭉치다’ 뜻의 ‘두리마을(www.doori7.co.kr)’로 불리며,

허브·약초 체험장 및 지역홍보관이 운영되고 있다. 특히 마을 전체를 연결한 자전거 길은

총 7.5㎞로 1시간 30분 정도면 두리마을을 둘러볼 수 있다. 서울 남부터미널에서

안성으로 15분 간격으로 버스가 운행되고 있으며 동서울터미널과 강남고속버스터미널에서도 운행된다.

안성 시내에서 금광면 방면 버스를 타면 20분 정도 걸린다. 승용차로 갈 경우 경부고속도로를 타고

안성IC에서 나온다. 안성시청 방면 38번 국도를 타고 안성시에 들어가서 302번 지방도를 타고

금광면 방향으로 가면 된다. 내비게이션은 ‘경기도 안성시 금광면 신양복리 295번지’로 검색.

맛집으로는 마을 초입 농협 옆 ‘국보 966 옛날두부’집이 있다.

두부요리 전문점으로 몸에 좋은 100% 국산콩으로 직접 만든 콩비지백반, 청국장, 순두부, 보쌈, 두부전골 등의 메뉴가 깔끔한 밑반찬과 함께 입맛을 돋운다. 그날그날 두부를 만들기 때문에 입구에서 남은 비지를 무료로 담아갈 수 있다. (031-671-09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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