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프카의 삶

카프카의 삶

입력 2010-03-01 00:00
수정 2010-03-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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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철학 토론 즐겨 폴락·브로트와 우정 쌓아

이름도 제대로 부여받지 못한 채 난데없는 판결 앞에 허우적대는 인물들.

프란츠 카프카(1883~1924)의 작품 안에서 발산되는 엄격하고 고독한 기운 때문에 많은 독자들은 카프카가 깊은 사색 속에서 자족하는 쓸쓸한 작가 생활을 했을 거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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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쑥한 카프카
멀쑥한 카프카
1908년 보헤미아 왕국의 노동재해보험협회 직원이라는 그의 딱딱한 명함도 이런 이미지에 한 몫을 보탰을 듯하다. 하지만 카프카는 이방인이 아니었다. 성실한 직원으로 인정받았으며 동료들에게 신뢰를 받았다. 182㎝의 큰 키와 경쾌한 몸놀림으로 친구들과 함께 승마, 테니스, 수영과 같은 스포츠를 즐겼다. 카페와 거리에서 프라하의 지식인들과 함께 철학과 예술을 논하고 무정부주의적 색채를 띤 클럽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니체, 다윈, 보들레르, 알베르트 아인슈타인. 이 모든 인물들의 삶과 작업들이 카프카와 친구들의 토론 주제였다. 서로에 대한 깊은 배려와 진리를 향한 진지한 토론은 그가 평생을 머무른 프라하 생활에서 핵심이었다. 단 한 번도 결혼에 성공한 적 없었지만, 그는 모든 우정과 사랑이 글쓰기의 장애물이자 동력으로서 반드시 필요한 요소라는 것을 완전히 인정했다.

고교 시절 절친인 오스카 폴락에게 보낸 편지의 한 구절을 보자.

“너는 나에게 창문과도 같은 존재야. 그 창문을 통해 나는 밖을 내다볼 수 있지. 혼자서는 할 수 없어. 나는 키가 큰데도 창틀에는 미치지 못하기 때문이지.”

그렇다. 친구란 세상으로 난 창문이다!

사랑과 우정이 갖는 미덕을 깊이 신뢰한 카프카는 사후에도 우정의 힘을 톡톡히 맛보았다. 친구 막스 브로트는 1935년 베를린에서 나치 정권 하에서 금지되고 있던 카프카 작품의 전집 편집을 시도했다. 위험을 감수한 그의 노력으로 1937년에 프라하에서는 최초로 그의 전기가 나올 수 있었다. 독일어 사전에는 ‘카프카적이다’(kafkaesque)라는 형용사가 있다. 그는 역사와 전쟁, 운명과 선택, 절망과 희망 사이에서 출구를 찾고 헤매는 모든 사람에게 자신의 이름을 선물로 보낸 셈이다.

서울신문·수유+너머 공동기획
2010-03-01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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