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려 2700여곡···’섬마을 선생님’에서 ‘비 내리는 호남선’까지

무려 2700여곡···’섬마을 선생님’에서 ‘비 내리는 호남선’까지

입력 2010-03-14 00:00
수정 2010-03-14 1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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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마을 선생님’ ‘기러기 아빠’ ‘초우’ ‘비내리는 호남선’ ‘마포종점’ ‘가을을 남기고 간 사랑’….

 한국인의 애환을 노래하고 가슴을 적신 이 주옥같은 노래는 모두 한 작곡가에게서 탄생했다.14일 별세한 박춘석씨 작품이다.

 박씨는 1950년부터 40여 년간 마르지 않는 창작열로 국내가요 작곡가 중 가장 많은 곡인 2천700여 곡을 남겼고,그중 1천152곡이 한국음악저작권협회에 등록됐다.역시 최다 등록이다.

 ‘검은 뿔테 안경’이 트레이드 마크인 박씨는 네 살 때부터 풍금을 자유자재로 치기 시작하며 ‘신동’ 소리를 들었고는 봉래소학교,경기중학교를 거치는 동안 피아노와 아코디언을 스스로 독파했다.

 박씨의 동생인 작곡가 겸 피아니스트인 금석(75)씨는 “어릴 때부터 형은 유성기에서 한번 들은 노래를 곧바로 화음을 붙여 다시 풍금으로 연주해내는 천재였다”고 회상했다.

 박씨가 처음 피아니스트로 무대에 선 것은 1948년 경기중 4학년(고교 1년) 때로,길옥윤·베니 김 등의 제의로 명동 ‘황금클럽’에서 연주를 했다.

 1949년 피아노 전공으로 서울대 음대 기악과에 입학해 1년간 다니다 중퇴한 그는 이듬해인 50년 신흥대학(현 경희대) 영문과로 편입,졸업했다.

 본격적으로 악단을 결성해 활동을 시작한 것은 9·28 수복 직후부터.당시 12인조 악단을 직접 결성해 충무로2가 은성살롱에 전속밴드로 들어갔고,이후 미군 상대 클럽인 금천대회관 등의 무대에도 선 그는 대학 졸업 후 악단을 재정비,중앙방송(현 KBS) 라디오 전속 경음악단으로 들어간다.

 대중음악평론가 박성서씨는 “주로 샹송과 팝 등 외국가요 편곡이 레퍼토리의 주류를 이루었던 이 무렵 고인은 주위의 권유로 첫 작품 ‘황혼의 엘레지’를 창작한다”고 말했다.

 KBS 경음악단장으로 활동한 지 1년 뒤인 1955년 오아시스레코드사에 전속되면서 그는 박단마의 ‘아리랑 목동’에 이어 ‘비 내리는 호남선’을 히트시키며 스물여섯 살의 젊은 나이에 천재성을 주목받기 시작한다.

 이어 ‘다정도 병이런가’ ‘나폴리 맘보’ ‘아주까리 주막집’ ‘불국사 길손’ 등을 발표한 그는 패티김을 세상에 알렸다.당시 미8군 무대에서 활동하던 패티김은 박씨가 만든 번안곡 ‘틸(사랑의 맹세)’과 ‘파드레’가 수록된 첫 독집음반을 내며 유명해졌다.

 이때부터 ‘박춘석 악단’을 이끌고 주로 박단마,백일희 등 당대의 팝 싱어들과 호흡을 맞추던 그는 영화음악에도 진출해 ‘진리의 밤’ ‘삼팔선의 봄’ ‘사랑이 가기 전에’ ‘임자 없는 나룻배’ ‘유랑극장’ ‘초연’ ‘가슴 아프게’ ‘섬마을 선생님’ 등의 영화 주제가를 만든다.

 1964년 지구레코드사로 옮긴 그는 이미자와 함께 음악인생의 변화를 맞이한다.스스로 이때를 ‘제2의 전환기’라고 말한 그는 본격적으로 트로트로 작품을 급선회한다.

 ‘섬마을 선생님’ ‘기러기아빠’ ‘흑산도 아가씨’ ‘황혼의 블루스’ ‘그리움은 가슴마다’ ‘한 번 준 마음인데’ ‘아네모네’ ‘떠나도 마음만은’ ‘삼백리 한려수도’ ‘낭주골 처녀’ ‘타국에서’ ‘노래는 나의 인생’까지 이미자와 콤비를 이뤄 발표한 곡은 무려 500여 곡에 이른다.

 그가 일생 동안 작곡한 노래의 4분의 1을 이미자가 불렀고,이미지가 부른 노래의 3분의 1을 박씨가 지은 셈이다.

 그는 이와 함께 ‘가슴 아프게’(남진)를 비롯해 ‘초우’(패티김) ‘타인들’(문주란) ‘호반에서 만난 사람’(최양숙) ‘방앗간집 둘째딸’(쟈니브라더스) ‘마포종점’(은방울자매) ‘별은 멀어도’(정훈희) ‘마음이 고와야지’(남진) 등을 잇달아 발표,히트 제조기로 명성을 날렸다.

 1978년 12월에는 일본 콜롬비아 측의 의뢰로 일본 최고 여가수 미소라 히바리에게 ‘카제사카바(風酒場)를 취입하며,미소라 하바리에게 곡을 써준 최초의 외국인 작곡가로 기록됐다.

 1980년대 초반 작곡가 길옥윤,송재리씨 등과 함께 태양음향을 공동으로 설립하기도 했던 그는 1988년 거성레코드사로 독립,본인이 추구하는 음악을 직접 음반으로 제작하기도 했다.

 그는 ’음악과 결혼했다‘며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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